시금치 원망
모시마(사내아이)가 궁상맞게 시금치를 다듬고 앉았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툭 튀어나온 입술을 보아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았다. 삽짝 사철나무 이파리가 성큼 길어진 해를 가린 탓인지 작은 마당에 그늘이 내렸다. 누런 댓잎이 덮은 웃 새미 양철 지붕에 떼지어 날아든 참새가 요란했다. 아이들 노는 소리가 학교 운동장에서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안절부절 짜증을 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한 보따리 시금치를 머리에 이고 오신 어머니가 이것만 다듬고 놀아라 는 말을 철석같이 믿은 게 화근이었다. 꼼짝하지 않고 거의 다듬어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바지게가 뒤늦게 풀어제낀 시금치 더미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주둥이가 만발이나 튀어나올 수밖에! 이걸 다듬으려면 날밤을 새울 것 같다. 오늘 놀기는 글렀다. 혀를 이리 차고 저리 차고 투덜거려 보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이를 눈치챈 어머니가 애들 그냥 보내주라고 아버지를 타일러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아버지다. 오히려 해가 다 져간다며 닦달을 한다. 산더미만큼 높이 쌓인 시금치가 원망스러웠다. 애꿎은 지개 작대기만 잘강잘강 담부랑에 두들겼다.
해풍을 맞은 시금치는 추위를 견디느라 애써 키를 키우지 않는다. 그런 탓에 옆으로 바래져 잔손이 많이 갔다. 유난히 뿌리가 붉고 당도가 많아 맛이 좋았다. 더군다나 거친 질감에서 오는 상긋한 식감은 겨울철 내내 밥상에 올라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나 봄기운을 받은 이맘때의 시금치는 웃자라서 색깔이 엷고 싱거워 상품 가치가 떨어졌다. 그러니 지난겨울에 캐고 남은 시금치를 떨이해 내느라 있는 대로 켜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마침 내일이 읍내 장이 서는 날이니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다듬은 시금치는 일일이 지푸라기로 묶어서 단을 만들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밤중까지 일은 계속되었다. 졸려서 하품이 나면 낮에 놀지 못했던 짜증까지 겹쳐 줄곧 주리 난장을 틀었다. 두 손의 엄지와 검지는 누런 이파리를 떼느라 반질반질 윤이 났다. 금성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김상진이가 불렀든가? 흐드러지게 흘렀던 노래는 기억도 가물한 ‘고향 아줌마’였다. 꽃바람이 불어치면 라디오 잡음 같은 헛간 문도 같이 딸그락거렸다. 시금치 더미가 줄어들수록 졸음도 더해 갔다. 낡은 벽시계가 몇 번의 종을 치는지 몰랐다. 시금치 이파리 같은 초침만 재깍거리는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