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보석 사마르칸트

4일째(9월 9일) 2부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관광

by JumongTV

오늘은 티무르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 사마르칸트를 돌아본다. 아침 출발인데도 햇살이 뜨겁다. 낮에는 얼마나 뜨거울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09시 30분에 구르 아미르에 도착하였다. 구르는 무덤을 그리고 아미르는 장군을 일컫는다. 따라서 티무르 장군의 무덤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대제국을 건설하고도 칸의 칭호는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후 그는 사마르칸트라는 훌륭한 유산을 남기어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칸 그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무덤에 도착하였다. 아니 무덤이라기 보다도 차라리 화려한 궁궐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내가 이슬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전혀 무덤처럼 보이지 않는 건축양식이다.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사후 무덤들을 보면 집 같은 형태의 소옥을 짓고 그 안에 관을 묻는다. 티무르는 그래도 제국의 왕이기에 이토록 화려하고 크게 짓지 않았을까 한다. 건축물 뒤로 가면 문이 있고 그곳을 통하여 관들을 볼 수 있다. 티무르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일족들의 관도 함께 있다. 원래는 이곳의 지하에 잠들어 있었는데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위로 올렸다고 한다. 현재는 지하에 있는 원형은 공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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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무덤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1941년 소련의 통치자 스탈린은 티무르의 무덤을 발굴하여 모스크바로 이송하라 명령하였다. 발굴 작업당시 한노인이 발굴팀에게 “그 관을 열게 되면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요” 하면서 경고를 하였다. 발굴팀은 아랑곳하지 않고 티무르의 유골을 모스크바로 이송 준비를 끝냈다. 6월 22일 새벽에 독일은 소련과 맺은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침공하였다. 스탈린은 노인이 경고하였다는 말을 듣고 고민 끝에 티무르 유골을 다시 원래 그 자리에 묻었다. 그로부터 이틀뒤에 밀리던 소련군이 독일군을 격파하고 승전국이 되었다. 이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다.

“앞으로 어느 누구도 그의 관을 열지 못한다”


티무르가 화려한 도시 사마르칸트를 세웠다면 그의 손자 울레그베그의 의하여 사마르칸트는 문학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울레그베그는 지금의 종합대학교와 같은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천문대를 만들어 별들을 관측하였다. 한국의 세종대왕에 비견된다. 그의 흔적을 레기스탄 광장과 울레그베그 천문대를 방문하면 느낄 수 있다. 방문하여 보면 화려하고 섬세한 당시의 건축술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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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차로 20분여를 이동하면 한지공방이 있다. 이곳에 한지도 우리의 선조와 관련이 있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아들로 주몽의 후대 고선지 장군이 한지를 이곳에 전하였다는 설이 정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고선지 장군은 멸망한 고구려 왕족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인정받은 장수다. 그가 서역 원정길에 당나라 종이 기술자들을 대동 하였는데 이슬람제국 아바스 왕조에 패하면서 포로로 끌려간 그들이 한지 기술을 전하고 유럽까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고선지 장군이 패한 마지막 전투는 탈라스 전투로 탈라스는 현재의 키리기즈스탄에 위치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종이 제작술이 고선지 이전에 이미 전래되었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 하지만 종이다운 종이가 정식으로 전해진 것이 당시이기에 사서에 그리 적혀있는 게 아닌가 한다. 현재의 한지공방은 하나의 마을로 형성되어 있는데 한국의 농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강한 물살의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저곳에 물레방아 하나 만들어 놓으면 영락없는 한국 시골풍경이 되겠구나 하는 상상도 하여 보았다. 이곳 주민들은 한지 제작술을 보여주면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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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아프로시아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1950년 한 목동(牧童)에 의하여 발견된 벽화가 유명한 곳이다. 7세기 번영기의 소그드인이 그려져 있고 고구려 사신으로 보이는 조우관으로 쓴 두 인물이 후미에 조각되어 있다. 그들은 고구려 말기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하여 이곳까지 왔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고구려 말기에 당나라를 거쳐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보낼만한 여유가 고구려에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도 제기되고 있고 신라의 사신이란 설도 있다. 벽화는 심하게 훼손 되어 형태가 흐릿하여지고 있어 아쉬웠으나 그래도 멀리까지 와서 우리 조상의 흔적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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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공동묘지다. 공동묘지가 관광지화 되어있는 특이한 곳이다. 귀족과 왕비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화려한 묘지이다. 대부분 호화 저택처럼 지어진 이슬람 형식의 건축 양식이다. 건물 안에는 관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다양한 건축 양식들을 볼거리 삼아 둘러보는 것도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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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비비하눔 모스크로 향한다. 티무르는 총 8명의 부인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가장 총애했던 부인이 비비하눔이다. 그가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몽골계 귀족 출신이지만 칭기즈칸의 후예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 이 황금씨족(칭기즈칸 직계 혈통)과의 혼인이었다. 당시 우즈베크 지역은 칭기즈칸의 차남인 차가다이칸 계통의 황금씨족 지배지였다. 결국 그는 차가다이 칸의 손녀인 비비하눔과 혼인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얻게 되었다. 비비하눔은 귀한 부인이란 뜻이다. 그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얼마나 정통성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많은 선물을 비비하눔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비비하눔 모스크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독특한 설이 하나 있다. 즉, 티무르는 비비하눔을 위하여 중동에서 잡아온 건축 기술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를 지으라는 명을 내리고 전장으로 떠난다. 그런데 티무르의 귀환일이 다가오는데 기술자는 일을 하지 않았다. 다급한 비비하눔이 서두를 것을 명하자 기술자는 비비하눔의 볼에 입맞춤을 하게 하여 주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급해진 그녀는 허락을 하였다. 그러나 볼에 난 입술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티무르는 기술자를 첨탑 미나르에서 뛰어내리게 하여 죽이고 이후 비비하눔도 뛰어내렸다고 한다. 이것이 전설인지 실화인지 알길은 없으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입방아거리로 자주 오르 내린다. 또한 비비하눔의 나이는 티무르 보다 10살 이상이 많았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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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사마르칸트를 돌아보았다. 사마르칸트 투어도 무사히 끝났다. 차량과 가이드등 편의를 제공해 준 사마트칸트 파트너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 표하고 아프로샤 고속열차를 탔다. 타슈켄트까지는 2시간 10분이 소요된다. 좌석을 보니 친절하게도 비지네스석이다. 세심한 배려에 거듭 감사드린다. 기차는 한국의 케이티엑스와 매우 흡사했다. 역방향이라 조금은 불편했지만 지나치는 풍경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한국은 논경지 산 터널들이 주된 풍경이라면 이곳은 끝없이 펼쳐진 평야 지대와 밭작물이 주된 풍경이다. 그리고 군데군데에서 보이는 소와 같은 가축 풍경이 정감 더하여 준다. 여행의 성취감이 크기에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사마르칸트에 안녕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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