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건 다 했고, 이제 뭐 하지?
대학교 합격이 결정 나고서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첫 학기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등록과 동시에 신청했던 기숙사 결과 발표도 나와서 이번 주 금요일에는 기숙사 비용도 납부했다. 기숙사에 들어가려면 결핵 검사확인서가 필요해서 보건소에도 다녀와야 했다. 금요일은 아르바이트가 쉬는 날이라 집에서 뒹굴뒹굴할 수 있는 날이었는데, 나갔다 오려니 참 귀찮았다. 따땃한 침대 소파에서 누워있다가 큐티 마미가 친구를 만나러 외출한다고 해서 같이 나갈 겸하고 겨우겨우 일어났다. 이래저래 풀로 준비하고 나가긴 귀찮으니, 모자를 푹 눌러썼다. 간편하게 입을 수 있어서 애정하고 있는 브라운 원피스를 입었다. 착용감이 편하다고 해서 새로 산 쿠에른 구두도 신고, 묵직해서 따뜻한 코르덴 점퍼를 걸쳐 입은 뒤에 현관문을 나섰다.
금요일 오후는 날씨가 영상 6도였는데, 산책 겸 다녀오기에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막상 나가니 공기가 시원한 게 걷기도 좋고 기분이 좋아졌다. 20여 분을 걸어서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알고 보니, 발급에 5일 정도가 걸려서 2월 29일에야 받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귀찮다고 미뤄서 26일 월요일에 갔더라면 기숙사 입주를 못 할 뻔했다. 하하. 꿋꿋이 나온 나를 칭찬하며 5,600원을 수납하고 나왔다.
2월이면 곧 피자헛에서의 아르바이트도 끝이 난다. 스물일곱의 9월 중순에 들어간 것 같은데, 수능 준비하면서 피치 못하게 쉬었다가 수능이 끝나고 다시 3개월 정도 더 일하고 있다. 2월 마지막 주 스케줄만 끝나면 종료다. 시간이 이렇게 훌쩍 지나간 게 신기하다. 사장님과도, 같이 일했던 친구들과도 인사를 하겠지만 기회가 되면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본가인 집과 피자헛 사이가 5분 거리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3월부터 일할 곳이 필요하므로, 일하고 싶은 곳을 추려봤다. 대학병원 행정비서, 올리브영, 스타벅스 정도. 대학병원 행정비서는 홈페이지에서 모집하는데 공고를 자세히 살펴봤다. 후기도 찾아보니 영수증을 처리하는 사무 업무를 하는 것 같아서 지원할 생각으로 제출 서류를 확인해 봤다. 자기소개서, 최종학교 졸업 및 성적 증명서(무려 석차 기재 증명도 해야 한다), 등본을 비롯한 경력 증명서들을 내야 했다. 준비해서 지원하는 데에만 순수 7~8시간 걸린 것 같다. 자기소개서 쓰는 데에서 5시간인가 쓰고, 서류 준비하는 것만 2시간을 쓴 것 같다.
1. 성장과정(300자)
2. 성격 및 특기사항(300자)
3. 생활신조(300자)
4. 지원동기 및 장래계획(300자)
5. 업무 역량 및 업적(300자)
워낙 오랜만에 자기소개서를 쓰려니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이전에 취업 준비할 때 정리해 뒀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적느라 오래 걸렸다.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그리고 서류는 졸업한 학교에 전화해서 석차 기재가 된 스캔본을 메일로 받고, 동사무소에서 학교 졸업 및 성적 증명서를 뗐다. 집구석 어딘가에 있는 경력을 증명할 서류까지도 겨우 찾아 스캔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래도 그렇게 지원까지 마무리하니 괜스레 안정감은 들었다. 이제 학교도 정해졌고, 기숙사 입사만 남았으며, 가고 싶은 아르바이트에 지원서까지 제출했으니 말이다. 행정비서는 2주 내로 연락이 온다고 하는데, 과연 연락이 올진 미지수지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만약 안 되면 그때 올리브영 등에 지원하게 될 것 같다.
조금 시간을 거슬러서, 병원 지원 이후에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인 19일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집에만 있을 것이라 마음먹고서 집에서 책을 보다가 넷플릭스를 보다가 다시 책을 보다가 넷플릭스를 보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나자, 집에만 있기엔 좀 답답해져서 다짜고짜 나와 친구 K한테 전화를 걸었다. 일이 늦게 끝난다고 한다. 음 그렇군. 전화를 끊고 걷다가 롯백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편하고 예뻐서 잘 신고 다니던 로퍼가 해져서 괜찮은 신발을 찾고 있었는데 검색해 보니 쿠에른이 착용감이 좋다고 해서 가서 신어 보기로 했다. 원래 구매하려던 건 '로퍼'였는데, '스니커즈'도 궁금했다. 전화했던 친구 K가 롯데백화점 식품관 쪽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 친구도 볼 겸 쿠에른 매장도 가볼 겸.
인천터미널역에 도착해서 롯백 3층으로 올라갔다. 이리저리 두리번두리번하다가 쿠에른 매장을 발견했다. 직원분에게 검정 로퍼와 스니커즈를 보여달라고 했다. 로퍼도 예뻤는데 스니커즈가 구두치고 너무 편하고 깔끔해서 바로 구매해 버렸다. 올해고 내년이고 오래 신을 것 같다. AS도 가능하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러고서 친구의 일이 끝날 때까지 올리브영에서 구경하면서 기다리다가 같이 통닭집으로 향했다. 친구 K가 맛있다고 해서 중학교 때 살던 동네로 굽이굽이 찾아갔는데, 가서 통닭은 안 시키고 친구 K는 탕수육, 나는 황도를 시켰다. 생맥주도 같이. 황도랑 딸기랑 블루베리, 그리고 얼음 동동 띄워진 메뉴가 나왔다. 집에서 치킨을 먹고 나와서 배불렀는데 안주로 과일은 딱 맞았다. 예쁜 구두도 겟해서 기분이 좋고, K와 이런저런 얘기도 하다 보니 즐거웠다. 살이 계속 찌고 있다. 이런.
다시 돌아와서, 푹 쉴 수 있는 자유로운 19일 날에 답답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학 합격, 기숙사 신청, 아르바이트 지원까지 필요한 건 모두 미션 완료로 안정감은 들었으나 그것도 잠시, 머지않아 허무함도 밀려들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다림'만 남았으니까. 그런데 그 '기다림'도 일하느라 벌써 1주가 지나가고 있다. 남은 스케줄대로 일을 나가고, 몇 개월 못 만날 친구를 만나다 보면 남은 1주도 순식간에 끝날 것 같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남은 시간들이 헛헛함으로 채워지기보다는 할 것들이 있는 편이 더 좋아서 그렇다.
한편, 신입생 카톡방이 개설되었고, 여러 가지 공지가 올라오고 있다. 나는 필수적인 부분에 한하여서,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저기 올라오는 새내기들의 질문 공세들과 재학생들의 답변을 보면서는 아직 다른 세상 같아서인지 별 생각이 들지 않고 멍 때리게 된다. 대전으로 내려가기 직전에는 조금은 같은 세상에 있는 기분이 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