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가온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당시 이상형에 대한 주제가 나올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남성미의 상징, 전완근이다. 전완근과 그 위로 가열차게 뻗은 나뭇가지처럼 도드라진 혈관들에 여자들은 '어멋!' 하게 마련이다.
둘째 딸이었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힘쓰기를 좋아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집에서는 엄마의 집안일을, 밖에서는 친구의 일을 힘써 돕는 행위에 유독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엄마와 장을 보러 가거나 백화점에 다녀와 무거운 짐을 드는 일은 항상 내가 자처해서 도맡아 했다.
"우리 OO이 힘 정말 세네~." 라는 칭찬이 너무 기분이 좋았다.
둘째가 집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연스런 삶의 방식이었을까. 칭찬을 들을 때마다 호랑이 기운이 더욱 솟아났고 그에 따른 객관적인 힘의 강도도 점점 더 세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팔씨름은 저본적이 없었다. 웬만한 비실한 남자애들은 모두 제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이 무슨 어리석은 생각인가 싶지만.
타고난 근육쟁이인 것도 물론 한몫했다. 20살이 되어 한때 다이어트를 위한 헬스에 열심이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트레이너가 연신 옆에서 하는 칭찬에 기분이 업되어 더 열심히 했다.
"회원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오늘은 좀 더 달려볼까요?"
트레이너는 마치 나를 보디빌더를 만들 기세로 신이 나서 몰아쳤다.
매일매일 격일로 상체와 하체 단련에 열을 올렸다. 근육운동처럼 정확한 보상을 주는 것도 없었다.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너무도 정직하게 내 근육은 즉각 응답해 주었다.
물론 덕분에 체중도 조금 줄었지만 인바디상 나의 근육량이 표준이상으로 올라왔다. 보디빌더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의도한 것보다 훨씬 벌크업이 돼버렸고 생각보다 지방은 빠지지 않았다. 난 분명 여리여리한 여성이 되고 싶었는데 트레이너의 무한 칭찬에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대다 헤어 나오고 보니 어느새 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가 내 인생 헬스장 방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로는 특별히 기구를 이용한 근력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그러나 나의 근육들은 뭐가 그리 헤어지는 게 아쉬운지 대략 10년이 지나 30세 즈음에도 여전히 인바디상으로는 표준에서 보더라인에 걸친 표준이상으로 기록되었다.
뒤늦게 공부에 정진하여 의대에 들어가 선택한 과에서는 손과 팔에 기본적인 힘이 필요했다. 하늘하늘 여성스러운 나의 여자동기는 힘이 너무 약해 악력기를 들고 다니며 수시로 힘을 기르기도 했다. 교수님들은 처음 들어온 쪼꼬만 여자 레지던트 1년차에게 모두들 한 마디씩 하셨다.
"OO 이는 진짜 손이 장난이 아니네. 완전 반전이야. 얼굴은 이렇게 쪼꼬만데."
그럴 때마다 어색한 소셜스마일로 화답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고 칭찬인 건지 놀리는 건지 뭔지 모르겠는 어정쩡한 기분이었다.
현재 직장에서도 역시나 예외 없었다.
"원장님은 손 하고 팔 하고 정말 얼굴하고 왜 이렇게 반전이에요. 저도 근육 좀 나눠주세요. 하하."
40세를 기점으로 사람은 근육량이 급속도로 줄어드는데 덕분인지 이제야 나의 근육량이 드디어 표준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눈바디로는 어린이 둘을 키우고 계속 현업에 종사하면서 어째 점점 더 울끈이 불끈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지난 주말 가족들과 캠핑장에서 목장갑을 끼고 화로 속에 있던 고구마를 꺼내 껍질을 까고 있는데 언니가 한껏 놀라 말했다.
"와 핏줄 장난 아니네. 야 목장갑 끼고 있으니까 더 장난 없어."
남편도 옆에서 거들었다.
"좀 징그럽지 않아요?"
(당신 와이프거든.)
오늘도 나의 매력적인(??) 전완근과 그 근육들 하나하나를 먹여 살리기 위한 혈관들은 참으로 열일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있어 생업을 이어가는데 조금은 수월한 점이 없진 않으나 아주 가끔은 너무 열일중인 그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물론 노인이지만 사실 나도 여자이긴 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