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나의 글에 영원히 살아줄까
주변 공기를 모두 모아 숨을 깊게 들이쉰다. 쓰읍 하아. 그러면 갈비뼈가 벌어지며 폐가 부푼다. 한 번씩 답답한 기분이 들 때 숨을 크게 쉰다. 마찬가지로 답답해진 집안의 창을 연다. 창문 안과 밖, 바람이 통하며 집안이 숨을 쉰다. 바람에 향초의 향이 날리며 집과 나의 숨에 향이 밴다. 언젠가 지금처럼, 내 입에서 누군가의 향이 나온 적이 있다. 깨끗한 향을 품고 있던 사람의 향취. 사람들마다 각자 고유의 향을 지니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선 유난히 나쁜 향이 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불쾌한 향이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안에 혼자 있을 때 그 사람의 향이 종종 내 입을 통해 나왔다. 서로에게 건네준 숨결이 내 안에 갇혀, 그리울 때마다 보이지 않는 입김을 내뿜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없는 방은 찬기가 돌며 추웠다. 그래서 그가 부족할 땐, 숨이 부족한 기분이 들며 그의 향이 묻은 입김이 나왔다. 현재 집안엔 온기가 돌며, 그 향은 증발해 버렸다. 지금 나의 입에선 습관적으로 까먹은 초콜릿의 찝찝한 단내가 난다.
나는 초콜릿을 좋아한다. 초콜릿의 무엇이 나의 취향을 저격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개별 포장된 초콜릿을 하나씩 까, 입안에 넣고 굴리면 입 안에 행복이 데구루루 굴러다닌다. (한자리에 앉아 쉼 없이 초콜릿을 먹는 나를 보며 옆 사람은 당뇨에 걸린다고 나무라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 둘 까먹은 초콜릿의 껍질이 쌓이다 무너질 때 내가 행복에 둔해졌다는 걸 느낀다. 많은 양의 초콜릿을 먹으면 단맛이 사라지고 죄책감의 쓴맛이 난다. 행복이란 적당한 결핍에서 온다는 걸, 조금씩 모자랄 때, 아쉬울 때 더 만족스러운 법이라는 걸 과도한 행복을 섭취한 뒤 깨닫는다.
초콜릿을 한쪽에 치워두며 쌓인 쓰레기를 버린다. 그 쓰레기와 함께 버려지길 기다리는 다른 것들도 버린다. 무언가 가득할 때 행복을 느끼곤 하지만 무언가를 비워낼 때에도 행복을 느낀다. 특히 주말에 무언가를 버리고자 하는 충동을 잘 느낀다. 수많은 물건들과 함께 있다 보면 왠지 모르게 거슬리고 이건 뭐야 또 저건 뭐지? 하며 쓸모를 묻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만히 잘 있던 물건들은 억울하게 끌려 나와 나의 선택을 기다린다.
뭐든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이상하게 무언가 거슬린다. 눈에 계속 띌수록 거슬리고, 거슬리면 궁금해지고, 궁금하면 질문을 하게 되고, 질문을 하면 음... 어쨌든 함께하는 시간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다. 집안에 쌓인 나의 선택들을 가만히 보며 다시 정리한다. 이것저것 정리하며 버리는데 서랍 속에서 자꾸 사진들이 나온다. 오래전에 넣어두고 보지 않은 사진들이지만 왠지 모르게 버릴 수가 없다.
드라마에서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어요’라는 대사가 나왔었다. 추억은 그저 말 그대로 추억이기 때문에, 지나간 시간들이기 때문에. 소멸한 것에 무슨 힘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우리에게 기억과 사진으로 남아 평생의 이야깃거리가 된다. 추억을 말로 옮기면 조금씩 각색이 되어 문장이 달라지지만, 사진은 그때 모습 그대로 멈춰있어 추억의 증거로 남기기에 알맞다.
내 침대 머리맡에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잔뜩 붙어있다. 침대에 엉망으로 누워 사진을 올려다보면, 내가 즐거웠던 공간에 애정 하는 사람들이 함께 찍혀 있다. 사진 하나를 눈에 담으면 재생 버튼이 눌려 영상이 재생된다. 집안에 퍼진 향초의 향을 맡으며 치워둔 초콜릿을 다시 꺼내 입에 넣고 추억을 돌려보면 이만한 행복이 없다. 주말에는 시간을 낭비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