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따뜻한 도시락을 싸주고 싶었어.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개인의 이력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성실하게 학교생활 해왔고 학업능력도 우수했다면 이아이는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다분히 있다."라고 세상잣대로 나름의 판단?를 받게 되었다. 덕분에 딸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물론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상담을 받아야 했다. (심리상담은 사설기관에서도 수개월째 받고 있던 터였다.) 법원 명령으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2년의 생활기록부를 첨부해서 받은 결과다.
세상은 딸이 살아온 발자취로 가능성을 보고 기회를 주었다. 그래 뭐든 사는 동안 힘들었어도 세상에 쓸모없는 노력은 없구나.
아이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명치끝을 넘어섰다. 그렇다고 승질머리대로 들어 엎을 수도 없으니 마음이 하와이 활화산 같다. 어느 날 저녁 딸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좀 늦어요."
"그래, 우리 딸~ 조심히 다니고 너무 늦지 않게 노력해 보자~." 최대한 밝게 웃으면서 끊는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너를 정신병원에라도 넣어야 되나 매일 고민되는 와중이다. (몇 시까지,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이라는 질문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필요 없음을 깨닫게 된 이후 묻지 않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둘째가 말한다. "엄마, 슬프면서 일부러 그렇게 밝게 웃고 말한 거죠? 엄마표정은 너무 슬퍼 보여" 몹쓸 연기력이다. 둘째는 엄마에 대한 분리불안도 심한 터라 최대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감정을 들키고 눈물이 터저버렸다. 자그만 손으로 눈물을 닦아줄 때는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둘째에게 위로받아 감사하고, 슬프게 해 미안했다.
둘째를 보며 첫째를 돌아본다.
10 살인 둘째는 아직도 애기아기 같다.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를 찾는다. 엄마가 잠시라도 외출하면 전화가 빗발친다.(초등 1-2학년때는 아침에 등교하고 엄마 퇴근길에 손잡고 같이 집에 들어오는 씩씩한 아이였다. 지금은 마음껏 욕구분출 중이다.)
10살이었던 딸은 낮시간 동안 엄마에게 전화 한번 한 적 없었다. 집 근처 공부방을 몇 년씩 다녀도 "오늘은 너무 힘드니 쉬면 안 돼요?", "오늘은 친구들과 놀고 싶으니 하루 빼주세요"라고 여느 집 아이들처럼, 우리 둘째처럼 그 흔한 투정이 없었다. 투정 없었던 아이가 그때도 지금도 참 아프다. 방학 때면 혼자 식은 스팸김치볶음밥을 데워먹거나, 편의점 도시락. 본도시락. 배달음식 등. 다양한 도시락메뉴를 섭렵했다. (한식파인 우리 집 아침은 항상 밥으로 준비해야 했기에, 점심까지 준비하기 버거울 때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스팸김치볶음밥은 간편하다는 이유로 자주 식탁에 올려졌다.
하지만 마음은 항상 이런 도시락을 싸주고 싶었다. ▽▽▽
코로나 2년 차 접어들었고, 둘째는 초2에서 초3이 되고 있었다. 학교컴퓨터실로 돌봄으로 매일 등교하지만
코로나로 학교에 가서도 줌수업을 받아야 되는 때이다. 줌수업을 학교에서 들어도 모르면 질문하고 그걸 해소할 방안들은 너무나 부족했다. 초3이 되던 해 직장을 쉬기로 했고 아이 옆에 있었다.
처음으로 함께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것 다하리라. 는 마음으로 매주 재미난 거리들을 찾아 다녔다. 아이는 즐거워했다. 덕분에 여름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겨울방학은 언제 인지 물어보았다.(엄마는 기력이 쇠진하여 이 질문이 무서웠다. 겨,, 겨울방학은 기나긴데 난 어떡하지?)
그렇게 둘째와의 시간 속에 지나간 첫째의 시간들이 순간순간 마음에 밟힌다. 방학이 즐겁다고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이에겐 늘 외로운 방학이었고. 외로운 점심식사였겠구나. 중학교에 배정받고 대성통곡을 했었다. 친구들과 달리 우리 딸만 생뚱맞은 학교로 배정된 것이다. 숙기 없는 딸이 친구가 없어졌다고 서럽게 울었었다. 그리고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외로운 식사는 방학이 아니어도 계속 이어졌다.
남들 다 그렇게 살아. 우리만 그러는 거 아니야. 다른 애들도 집에서 그렇게 있어.라는 말들로 자신을 위안하면서 아이에게도 무언으로 그게 별일 아님을 크게 고통스럽지 않은 시간임을 강조했었다.
돌아보면 아쉽고, 아프고, 안타까운 시간들이었다.
너의 외로운 시간들을 마음으로 동감하지 못했던 AI엄마였다. 둘째와 함께 할수록 첫째의 애석한 시간들이 온전히 느껴졌다. 그렇게 미웠던 마음이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또 안쓰러운 마음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엄마를 맘껏 느낄 수 있도록 옆에 있어 주자고 다짐했다. (나는 다 주었지만 네가 부족하다면 부족한 게 맞다.)
그리고도 한동안 그렇게 "엄마인생 살았으면 이젠 내가 좀 생떼 부려도 받아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반문하듯 딸은 살아갔다. 1년만 쉬고 복귀하려던 내 치밀한 계획은 다른 의미 있는 시간들로 채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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