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여자> 김희정 감독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상실,
슬픔이 밀려오고 분노가 덮쳐오는 일.
치유라는 말은 발이 너무 빨라 종종 아픔과 슬픔, 분노조차 앞지른다.
무엇을 치유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타의에 의해 진단되고 처방을 받는다.
그들은 줄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며 안도한다.
그래서 난 상실 다음에 으레 따라오는 치유라는 말이 싫다.
명지 또한 남편을 잃고 성급히 찾아오는 치유와 위안의 거친 손길을 피하고 싶어 훌쩍 폴란드로 갔을지 모른다.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곳에서 AI와만 대화한다. 물어보는 말에 AI는 같은 대답만한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공감이나 위로보다 ‘할 수 없다’는 혹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기계적인 말이 차라리 나은 순간이 있다.
적어도 빨리 털고 일어나라는 강요는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있어도 괜찮다는 느낌을 주는 말이므로.
상실 이후 할 수 있는 일은 명지와 친구인 현석의 대화 내용처럼,
‘그때 그렇게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끊임없는 반추 혹은 복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한탄을 곧 하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명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공항으로 가는 도중 사이렌이 울리며 바르샤바 봉기(1944년 여름,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소련군은 독일군을 격파하며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진격해 오고 있었으나 소련은 폴란드의 독립에 비관적 태도를 보였다. 이에 폴란드 망명 정부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당도하기 전에 자력으로 폴란드를 독립시키기 위해 폴란드 내 지하 저항 운동 조직인 폴란드 지하국가에게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을 지시했다. 따라서 바르샤바 봉기의 목표는 첫째로 독일 국방군을 바르샤바에서 몰아내는 것이었고, 둘째로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해방시키기 전에 폴란드인들의 손으로 바르샤바를 해방시켜 폴란드의 정통성에 대해 소련보다 우월을 점하는 것이었다.-나무위키)를 추모하는 모습을 본다. 1년에 딱 한 번, 그것도 1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하는 일이지만. 그 모습이 아프면서도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명지의 남편 도경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미처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학생 지용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들어갔다가 학생과 함께 나오지 못했다. 명지는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내버려 두고 그런 행동을 한 도경이 말이다. 하지만 지용이 누나, 지은의 편지를 읽고 다시 생각했다.
‘삶이 죽음에 뛰어드는 게 아니고, 삶이 삶에 뛰어들었던 것’이라고.
지은 또한 지용이의 소식을 듣고 몸이 마비되어 병원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지용이의 누나는 도경이가 지용이의 ‘손을 잡아준 마음’을 평생 궁금해하며 살겠다고 썼다.
상실은 또 다른 상실을 불러온다. 나는 이것을 상실의 연쇄 작용이라고 부르고 싶다.
도경을 잃은 명지는 원인 미상의 피부 질환에 걸리고, 지용이 누나는 몸의 오른쪽에 마비가 온다.
잃어버리고, 잃어버릴 것이 더 이상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할 수 있다.
상실은 끊임없는 되감기의 연속이며, 현재가 아닌 그때의 무한 재생이다.
마음은 항상 나아지겠지만, 꼭 지금일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