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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반맨 Jan 06. 2023

기억

49금 인문학 사전 10.

80 넘은 노인네가 그의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 '허니'...
이를 눈여겨보던 후배가 어찌 그리 금슬이 좋으냐고 부러워하며 묻자 돌아온 대답.
"사실 아내 이름을 진작에 잊어버렸는데, 다시 물어보기가 무서워서 그냥..."
이런 걸 웃프다고 하는가?
내게는 마냥 웃기기만 한 유머가 아니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이상으로  슬프기도 한 얘기다.
나도 늙어가면서(내년엔 나도 경로우대증 받는다!!) 건망증이 점점 심해지며, 조금 전에 읽은 글도 돌아서기 무섭게 가물가물해지는 걸 실감한다.
치매라는 무서운 병도 결국 기억능력에 문제가 생겨서 처자식도 못 알아보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다가, 결국은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불치의 병 아닌가?
그러고 보니 해마다 10월 말일만 되면 40년 가까이 주구장창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을 불러대는 이용이라는 가수는 대단한 기억의 소유자다.
적어도 치매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미래를 예측한다고 한다.
그런데 예측이라는 뇌의 활동은 과거의 기억에 기반한다.
아시다시피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인류 전체를 original sin(짝퉁이 아니라..)에 고통받게 만들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두고두고 지탄받을 짓을 했을까?
그러나 아담 입장에서 변명을 해보자면, 그때까지는 그 과일을 먹어본 경험 즉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이 미래에 어떤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을 테고, 따라서 우리 인류가 아담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탓할 수도 없고 어찌해야 하나.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포유류보다 6배나 큰 뇌와 유전자에 그들의 온갖 기억을 담아 자자손손 물려준 덕분에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해 왔다.
그들이 3만 년 전 쇼베동굴에 그린 들소의 모습은 사피엔스가 죽기 살기로 협동하여 사냥한 기억을 그려낸 것이다.
그 피 튀기는 사냥의 기억을 집단이 공유하고 개량하며 더 효율적인 사냥 방법을 찾아냈기에 사피엔스는 생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후 인류 문명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 도구였다고 평가되는 언어와 문자도 개개인의 경험을 기억하고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결론적으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미래를 예측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인류의 문명을 만들어 온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주된 이유는 어떤 불투명하고 혼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현재의 행동을 결정하고 그에 따른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은 정확성과 객관성이 중요한데 과연 우리의 기억은 그러할까?
안타깝지만 우리의 기억은 정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어떤 경우는 거의 허구에 가깝기도 하다.
뇌는 자신이 본 것을 기억으로 저장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선, 기억에 남길 것들만 기억에 남겨둔다.
그렇게 남겨진 기억조차도 사실적인 기억과 심리적 기억이 뒤섞여 있으니 이런 기억을 믿고 어찌 내 생각과 행동을 정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겠나?

극단적인 경우지만 '거짓 기억 증후군'이란 게 있다.
우리가 실제 사건을 기억한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또 다른 기억을 기억하는 것뿐일지도 모르고, 그 기억이 다시 또 다른 기억을 기억하고...
이런 식으로 이어져 그 기억이 실제 사실인지 상상의 결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그 기억이 사실이건 허구이건, 나쁜 기억들은 종종 사람의 감정을 피폐하게 만든다.
과거의 좋지 못한 기억에 빠져들면 현재를 직시하지도 못하고 나아가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게 된다.
많은 정신적 질병들이 바로 이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별적 기억과 선별적 망각이 필요한 것이다.
필요한 기억은 머리에 넣고 불필요한 것은 넣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물병을 들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을 예를 들어보자.
이때 문제 되는 것은 물병의 무게가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오래 들고 있는가이다.
과거의 나쁜 기억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래 들고 있을수록 그것들은 이 물병처럼 그 무게를 더하게 된다.
그러니 과거를 내려놓고 현재를 붙잡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오래전에 놓아 버렸어야만 하는 것들을 놓아 버려야 한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야만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기억의 정화 Memoriae purificatio'이다.
나쁜 기억도 정화를 해서 감정의 앙금을 걷어내야 하지만, 좋은 기억조차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야만 더욱 차분하게 다가올 미래를 마주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기억의 정화'로 처리될 수 없는 것들은 '망각'을 해야 한다. 
'망각'이란 뇌의 작용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서 읽었던 내용을 옮겨본다.
"나는 내가 가둔 자이며, 나는 나를 가둔 자다. 어설픈 현자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 곧 삶인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엔 현자들이 속인 게 아니라, 삶의 과정을 말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지나면 이내 내가 누구인지를 잊는 과정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게 인간으로서 성숙하고 지혜로워지는 과정이다.
학문은 매일매일 더해가는 것이고, 도는 매일매일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했으니 상통하는 말이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無爲)
 

'Ne memineritis priorum et antiqua ne intueamini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말라'라는 말이 성서에 있다.
부처님은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心不妄取過去法  亦不貪着未來事 不於現在有所住 了達三世悉空寂
(심불망취과거법 역불탐착미래사 불어현재유소주 요달삼세실공적)
마음으로 과거의 일을 취하지 말고 미래의 일도 탐하여 집착하지 말며 현재의 일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비어 공적함을 깨닫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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