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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반맨 Dec 30. 2022

정의

49금 인문학 사전 09.

혹시 정의를 정의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읽어본 적이 있는가?
근데 지금 정의에 대해 쓰면서 뜬금없이 조용필의 노래 '정이란 무엇일까?'란 노래를 떠올려본다.
아니 왜? 무슨 관계가 있기에? 실없지만 그냥 발음이 비슷해서ㅎㅎ.  
첫 구절이 이렇다.
"情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그런데 얘기가 옆으로 잠깐 새기는 하지만, '情'이란 게 기본적으로 사적이고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사이에서 주고받는 서로 아끼고 챙겨주는 마음, 뭐 이런 거다.
그러니 '정'이란 걸 뭐 복잡하게 이러니저러니 사회적으로 정의할 것도 없는 거다.
그런데도 정이란 게 뭔지 헷갈린다고 노래로 만들고 절절하게 열창을 해댄다.
 여하튼 개인적으로 이 노래 무지하게 좋아한다. 나만의 아득한 추억이 담겨있는 곡이라서...


다시 '정의'로 돌아와서...
그런데 '정의'라는 건 지극히 공적이고 제각각의 이해득실로 점철된 집단 내 또는 집단 간에 적용되는 가치 개념이다.
그래서 이걸 정의한다는 건 사회구성원들 간에 상당한 수준의 합의가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내로라하는 철학자, 사회학자, 법률가들이나 목에 힘주고 이러니저러니 논문도 쓰고 책도 펴내고 하는 것이다.
모두에 말했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도 10개 챕터, 443페이지에 달한다. 
근데 문제는 나 같은 무지렁이들도 틈만 나면, 입만 열면 공정이니 정의니 하면서 한마디씩 거들어 대지 않는가?
마치 제각각 제 칫솔이 하나씩은 있듯이 저마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드는 저마다의 '정의'가 있는 듯하다.
바로 이게 사회적 반목과 갈등이 시작되는 단초가 되는 것이고,  이런 현상은 비단 개인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 간, 종교 간에도 비일비재하다.
한쪽에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테러가 다른 쪽에선 비인륜적인 폭력으로 인식되는 거다.
 
'정의 Justice'와 관련된 서양의  경구가 있다.
"Charity begins at home, and justice begins next door. 
관용은 자기 집에서 시작되고 정의는 이웃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쉽게 말해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남한테는 정의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소위 '내로남불'에 비견 대는 말이다.  

'정의'의 대가 존 롤스는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1미덕이듯이, 정의는 사회제도의 제1미덕이다"라고 하셨다. 
사회제도를 논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개념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참고로 정의란 개념에 붙어 다니는 말이 '공정' 또는 '공평'이다. 
이하 그의 책에서 인용해 본다.
"사회 제도와 관련하여) 합리적으로 숙고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가장 폭넓게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누구나 공평하게 기회에 접근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의 이익과 모순되지 않는 범위에서 가장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는 그런 사회를 바랄 것이다"
그는 이런 것들이 그 사회의 정의의 원칙이 될 거라고 보았고, 이런 원칙하에서는 공평함이 곧 정의라고 말한 거다.
(많이 좌경화된 또는 진보적인 생각인 듯...)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더 많은 평등'을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려고 동의도 받지 않고 빼앗는 것 (즉 세금)은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로버트 노직'이라는 사람이다
이 정도로 '정의' 또는 '공정, 또는 평등'에 대한 극과 극의 시각이 존재할 정도이니, 정치하는 자들이 제각각 입만 열면 자신만이 '정의의 사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불의와 부패의 화신이라고 두 눈 부릅뜨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의로운 검사였는가 아니면 조국이야말로 시대를 이끌어 갈 정의로운 법무부 장관 나아가서는 대통령 깜이었는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또한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덕경 제1장 첫 문장은 "'道'라고 할 수 있는 '道'는 영원한 '道'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시작한다.  
'道'는 이름으로 규정하거나 정의되거나 논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이라는 개념에 적용해 보면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한다는 것, 사랑을 사랑이라는 개념 속으로 집어넣는다는 것, 그렇게 해서 개념화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정의'라는 것도 이런 거 아닐까? 
뭐라고 이름 짓고 개념으로 만들게 아니라 그냥 나 아닌 타인들과 어우러져 사는 삶 속에서 '己所不欲 勿施於人(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의 자세로 남한테 해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택할  '정의'의 정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런 착한 생각과 실천이 남에게 배신당하고 배척될 때, 그때는 어떡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글을 쓰다 보니 꼴에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릴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꼬락서니가 어떻길래 그렇게 말하냐고? 
얼마 전에 개끈을 풀어놓고 반려견을 산책시키고 있는 개 같은 아주머니에게 '정의감'에 불타서 점잖게 지적질을 했다가, "백수 주제에 네가 뭔 간섭이냐!"라는 악다구니를 당하고 속수무책이었던 자가 뭔 '정의'를 정의하겠는가 말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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