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력
면역력은 정신에도 있더라. 심리적 면역력이 높아서 자기 진정을 잘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신체의 힘뿐만 아니라 면역력, 그러나 또한 마음의 비행. 내면의 힘, 높은 보루, 우리 모두에게 닥친 두려움에 맞서. 높은 심리적 면역력, 너무나 순수한 소원, 요새 마음은 이것에 대해 확신한다. 삶의 충격을 흡수하면서도 우뚝 서기 위해, 투쟁 앞에서 결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달래는 영혼, 고요하고 고요한, 삶의 폭풍 속에서 평화로운 장면, 자신의 달콤한 노래를 아는 마음, 그것이 속한 곳에 올바른 마음, 나는 이 횃불이 밝은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 빛의 근원이 깊고 넓은 내면의 힘으로 어떤 폭풍이든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면역을 키우기 위해, 이 은혜, 고요한 공간을 개척한다. 이 힘, 이 마음의 평화, 진정한 자유가 나는 우리가 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끝
다음 생엔
돌이 되고 싶다.
염세주의 찌들 때 쓰는 잡글 모음 책이다.
이 책은 내가 염세주의 찌들었을 때,
우울증과 공황장애 올 때 쓴 시며,
끼적인 잡글들이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다.
강다희 지음
저자소개
우울증으로 나를 갉아 먹던 삶, 원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며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글 써 책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울증을 모르는 사람들과 우울증인 당신을 위해 글 쓴다. 제주토박이로 23년도 기준 작가로는 거의 십몇 년 활동하며 투잡 또는 쓰리잡 생활 하였다. 필명 매번 바꾸고 여러 장르를 써보고 도망치고 열심히 이어 나가며 유명해지다가, 또 힘들어서 도망치고, 또 버티고 반복했다. 그런 내가 싫어질 때쯤, 투잡 생활에서 느낀 바가 우리 인간은 직업으로 하나의 영혼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에 싫증 느꼈다. 작가는 잘 나가지 않으면 돈벌이가 안되는 직업 중 하나다. 그것이 초라한 나로 느껴졌다. 싫증 나면서도 내 영혼이 무엇인지 궁극적인 이유로 궁금해졌다. 작가라는 직업 영혼과 또 다른 영혼 직업들, 꿈 포기하지 않으려 여러 직업을 하며 경험 쌓았다. 내 경험은 곧 내 영혼 속 큰 바다가 되었다. 나는 매번 글로 배우고 여행 중이다. 내 삶은 글이다. 내 영혼은 글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계속 해야 고로 존재함을 느낀다. 나는 솔직히 기운찬 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변덕스럽고,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해버린다. 생각해낸 게 있으면 고민하기보단 도전하는 편이다. 기운찬 편이 아니라서 열심히 하다가 며칠 잠만 자지만 그래도 곧 잘 일어나 무언가 몰두한다. 이 글은 내가 염세주의 찌들었을 때 우울할 때 기타 등등 삶 느낀 바를 위해 쓴 잡글이며 어쩌면 시이기도 하다. 나는 성취로 느끼는 보상 감이 나의 커다란 동기이다. 나는 적극적이고 다양한 활동으로 보상 감을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작가가 된 이유도 그런 이유가 된다. 그렇다고 마냥 즐거워하는 것이 아닌 목표 의식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드러내는 일에 비교적 당당하다. SNS나 글쓰기가 그 예다. 나는 마음 가는 대로 하는 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날 늙은이로 보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철없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이 이 부분일 거다. 꾸물거리지 않고 일단 각이 나오면 빠르게 행동을 옮기는 편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여도 내 방식은 옳다고 느낀다. 정해진 틀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만 남이 하는 대로 곧이곧대로 하는 것은 싫어한다. 계획 파지만 세운 계획을 어기는 것도 다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결정장애인 면은 거의 없다. 내 행복이란 의미에 뿌리를 담고 있다. 내 세계가 뚜렷해서 내가 의미 부여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왜 해야 하지? 의미가 분명하면 누구보다도 의욕적이지만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의욕도 같이 잃어버린다. 무슨 생각해 그냥 해 머리로는 잘 알고, 생각하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아 이런 성격이 가끔 스스로 괴롭기도 하다. 나는 뭐든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과거의 기억 하나하나 곱씹어 지금과 연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자기만족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다. 주어진 평탄한 길이 아닌 내가 만든 나만의 길을 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기 위한 동아줄이기에 잡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전, 알아둘 게 있다. 나는 사람을 혐오하며 사람을 사랑한다. 모순적이지만 나는 사람에게 깊은 관심이 있다. 사람은 영감의 가장 큰 원천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을 사랑할 때 외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이성과의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내적 감정과 철학을 좋아한다. 난 사람을 깊이 있게 알고 싶다. 그 깊이를 사랑하며 호흡까지 본다. 그러니, 이 책을 천천히 보고 급하게 판단하지 마시길 바란다. 많은 번뇌와 그때그때 생각나서 쓴 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순적이며 그 글 일부가 다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나는 이상이 높다. 내 이상은 더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목마른 갈망이다. 완전한 선이 어렵다는 걸 너무 안다. 그 갈망이 큰 만큼 악에 대한 증오도 크다. 난 모든 사람에게 악을 보고 선을 본다. 인류애가 큰 만큼 인류 혐오도 크다. 나는 번민과 방황하며 인간인, 나 또한 혐오한다. 그러면서 내게 선을 보기도 하며 악을 본다. 그러나, 방황을 끝없이 했기에 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에, 깊이 있는 헌신 하면 변화가 될 것 충분하게 안다. 모든 관념은 모두에게 있다. 내 정체성은 어쩌면 끝없이 고뇌하는 거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글로 풀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러한 책이다. 어쩔 땐 철학적이고 어쩔 땐 우울하고 어쩔 땐 위로를 건넨다. 남들은 붕 떠 보일지 모르겠으나, 내겐 확고한 미래가 있다. 어려운 희망이다. 끝없이 목마르게 하는 희망이다. 그 희망은 너무 닿지 않는다. 마치 잡히지 않는 안개다. 다행히도 그 희망 끝에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내 끝없던 목마름을, 내 사랑하는 이들이 마실 물을 준다.
으르렁
천둥의 으르렁거림 속에, 흐려진 마음속에, 곤란한 종류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말 한마디, 손길 하나가 고요함을 깨뜨릴 수도 있고, 그리고 지속적인 피해를 위한 무대를 설정한다. 부드러운 플레이할 기분이 아니라, 행동이나 말을 조심하라. 내게 복수는 차갑게 내놓는 요리다. 가만히 지켜 보다 정 안되면 내 칼날은 어느 누구 보다, 날카롭게 너를 찌를 거다. 말할 수 없는 시대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는, 더더욱 날카롭게 다려놓았다. 경고하는 으르렁거림, 부드럽게 찌르기, 너무 멀리 밀지 말고 원한을 품지 말게 해라.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서약 하기로 결정 할 수도 있다. 당신에게 갚기 위해, 현물로든 더 나쁘게든,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의 끊임없는 저주. 두뇌와 재치로 난 너를 치밀하게 공격을 계획하고 퍼펙트 스톰 발화할 것이다. 퍼펙트 스톰은 개별적으로 보면 위력이 크지 않다. 그러나 태풍 등이 다른 자연현상과 동시에 발생하면 엄청난 파괴력을 내는 현상으로, 보통 경제계에서는 심각한 세계 경제의 위기를 일컫는 기상용어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자연의 손아귀에서, 복수는 용감하지도 대담하지도 않다. 그것은 불을 지피고 다툼을 일으키며 그리고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빼앗아 간다. 그러니 조심히 걸어봐라. 조급한 행동을 늘리지 말아라. 으르렁거리는 소리 속에는 경고가 있다.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경고 구절을 잘 기억해라. 인내와 친절 몰입은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얻은 힘이다. 그것을 너는 모르면 바보다, 도태되어 사회에서 철장이 널 계속 막을 뿐이다. 그러니 말하겠다. 복수는 달콤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러나 결국 낭비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을 도태시킬 명분을 만들 증거를 내게 만들지 말라. 낭비는 나도 싫다.
끝
회복력
태양 가로질러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슬픔이 마음을 짓누른다. 삶의 기쁨, 어디로 갔나? 행복에서 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영혼이 자유롭고 가볍게 춤을 추자. 이제 짐을 싣고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한때 활기차고 밝게 빛나던 하루, 이제 밤과 병합되어 승인되지 않는다. 수의와 같은 염세주의, 흐릿한 어둠 속에 생각을 감싼다. 이 황량한 상태에서 기쁨은 허용되지 않으며, 마음속의 희망은 감히 피지 못한다. 한때 위안이 되었던 자연의 아름다움, 이제 흐릿하고 흐릿하며 연약해 보인다. 사회는 공허한 궁전처럼 보이지만, 메아리치는 웃음소리가 쓰라린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다. 우울증의 손아귀는 차갑고 단단하다. 꿈을 질식시키고 빛을 어둡게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안에 작은 불꽃이 점화하고 표시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힘의 속삭임, 힘의 힌트, 가장 어두운 시간에 숨겨져 있었다. 절망과 공포 속에서도 인생은 풍성한 실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힘이 깃들어 있다. 고통 아래, 사랑이 머무는 곳. 도움을 구하고, 손을 내밀고, 손을 잡고, 단결하여 우리는 입장 밝힐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해가 뜰 것이다. 그리고 아픈 고통을 씻는다. 희망의 부드러운 치유의 밤, 모든 폭풍 속에서 평화와 고요를 가져온다. 잘 기억하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빛을 찾아 모든 톤에서 우울증의 사슬은 풀릴 수 있고, 사랑과 보살핌으로 감싸자.
끝
다음 생엔 어머니가 나의 딸로 태어나줘.
엄마야, 엄마야, 우리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사람인 우리는 마음이 아파서 피눈물이 날지언정, 신은 아니에요. 고통 속에서, 어린 시절을 기억해 보아요. 현재 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사람인 우리, 사랑하며, 울며, 웃으며 인간의 조건을 이해해 보아요. 엄마야. 엄마야. 자책하지 말아요, 버릇된다. 버릇된다. 버릇이라는 게 참 무서워요. 그건 지독하게 그 방향만 생각하게 만들어요. 우린 한낱 인간이에요. 세세하게 꼼꼼하게 다 자책하지 말아요. 우린 신이 아니에요. 신도 아니면서 굳이 세세하게 자책할 필요 없어요. 기억 언저리 끄집어내며 자책할 필요 없어요. 울어도 되어요. 당연한 반응이에요. 어쩌면 인간이기에 더욱 조금 자책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에 빠지지는 말아요. 너무 깊어서 나올 수 없을 수가 있어요. 우리는 모두 인간일 뿐,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어도 자신을 탓하는 것은 아니에요. 언제나 아픔 속에서도,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비난하지 않길, 바래요. 우리 모두, 살면서 가장 소중한 감정을 이해하며, 사랑과 눈물, 그리고 웃음 속에서, 슬플 때 우는 건 건강한 반응이기도 해요. 하지만 자책으로 가는 순간 건강한 반응이 아니게 되어버려요, 풍덩 심연까지 빠져 버려요. 그것은 상어가 되어 당신을 물어뜯게 먹이는 주는 꼴이에요. 죽음이 참 아이러니해요. 우리 삶과 참 연관이 많을수록 슬픔은 어찌 이리도 크게 올까요. 찰나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슬픔의 눈물이 흘러도 그래도, 자책은 필요 없어요. 다가올 미래에서, 엄마가 내 품에서 다시 태어날까요, 그리고 그때의 할머니는 엄마 품에서 다시 태어날까요. 통증 속에서도, 순수한 아이의 시절을 기억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지 말아요. 우리는, 이 세상의 감정을 헤아리며, 사랑, 눈물, 웃음 속에서 흘러가요. 엄마가 말했죠. 다음 생엔, 어머니가 내 딸로 태어나줘. 자식은 아무리 해도 부모보다 자식이 해준 것보다 못 해준 게 많다고 다음 생엔 저가 부모가 되고 어머니가 내 자식으로 태어나달라고 울었죠. 그만큼 할머니보다 못한 게 많다고 그게 후회된다고 울었죠. 인간의 본성 속에서, 우리는 모래성 같은 존재, 슬픔에도 눈물보다 깊은 감정이 숨어 있어요. 다음 생애에, 엄마가 할머니 엄마가 되고 할머니는 엄마 딸이 될까요? 별들 아래 어머니의 속삭임, "다음 삶에서, 제가 당신을 안을 테니," 빕니다. 된다면 그녀가 제 딸로 태어나길, 못해 준 만큼 더 많이 해주는 엄마가 되길. 현재 꿈속에서도 어머니가 되겠지. 눈물, 흘러내린 시간의 무게로, 한때의 실수와 아픈 기억들 무게로, "다음 삶에서, 내가 당신의 딸이 되겠지," 눈물에는 후회와 사랑이 담겼네요. 그 아픔과 사랑, 시간의 숲을 통과, 어머니의 마음, 다음 세상으로의 다리, 그것을 아프게, 아름답게 기억하리. 별의 무한한 회전 아래, 어머니의 가슴 속 숨겨진 꿈, "다음 생에는 당신이 나의 딸로," 세상의 원탁에서 재생의 춤을 추어요. 눈물, 잊힌 노래의 조각들처럼, 향기로운 기억과 시린 후회 사이에서, "당신이 저를 안고, 저가 당신을 안을 것," 그 가슴 아픈 약속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우주의 순환, 어머니와 사이 교감, 인생의 재즈를 따라 흐르는 두 마음, 그 아름다운 엇갈림 속에서, 사랑만이 영원히 흐르고 있어요. 별들 사이의 무한한 섬광에서, 엄마의 흔들림 없는 말 한마디가 묵직한데 흔들려요. 세계의 다양한 무대에서 운명의 원을 그리고, 눈물이 잠시 멈춘 시계의 틱탁 같이 따뜻한 추억과 치열한 미련 사이에서, 그 깊은 약속에는 사랑과 기대가 흐르네요. 인생의 바퀴, 어머니와 영원한 춤, 시간의 리듬에 따라 흔들리는 서로의 마음, 그 교차점에서, 우리의 사랑은 끝없이 이어지네요. 시간의 흐름 속, 어머니와 함께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혹은 제가 어머니 모습으로? 아픔 속에서의 기억, 청춘의 무심한 웃음 속에서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따뜻한 품을 잊지 말아요. 우리의 여정, 이 세상의 무한한 감정을 담아내며, 사랑, 눈물, 웃음이 교차하는 길을 걸어가네요. 하지만 자책하지 말아요. 신이 아니에요. 우린 한낱 인간이에요. 인간에 불과하기에 자책할 때 현재 어른이 되어 못해 준 거 말고 어린 시절 생각해보아요, 현재를 생각하면 자꾸 모든 것이 다 자책으로 꼬리를 무는 우리 엄마이기에, 내가 어른인 상태일 때 나의 할머니일 때 그때 말이 에요. 자책밖에 안 하는 엄마이기에, 엄마가 어린 시절 할머니가 젊은 시절 혼났던 것도 생각해보고, 재밌었던 것도 생각하고 좋은 것만 생각해줘요. 자책은 안 되어요. 그 무거운 아픔에도, 어린 날의 순진한 기쁨을 찾아, 자신의 그림자에게 따뜻한 위로를 보내요. 우리의 삶 속에서, 빛나는 별처럼 존재하는데, 그 눈물의 의미는 슬픔 이상이라는 거 알요. 그 슬픔 속에서만 울면 안 될까요? 엄마야 영원의 문턱에서, 다음 생엔 할머니가 엄마 딸 해요. 우리 그렇게 해요. 우리의 발자취, 세상의 각종 감정을 들어보며, 사랑과 눈물, 웃음의 교차로 물드네요. 별빛 아래의 순간들 속에, 우린 바람에 실려 부서지는 꽃잎, 슬픔의 물결 위, 깊은 바다를 그리는 눈물. 영원의 무대에서, 어머니는 나의 어제, 나의 내일, 그녀의 꿈이 나는 다시 태어나는 빛이 되어 흐르는 시간 속 깊은 그늘에, 청춘의 노래는 아직 내 귓가에, 그림자마저 따뜻한 품으로 내게 돌아와. 세상의 춤, 색색의 감정과 함께 흔들리며, 사랑, 눈물, 웃음의 하모니로 울려 퍼지고 있어요.
끝
다음 생엔 돌이 되고 싶다.
모두가 돌이었으면 고통도 없다. 역사를 보면 삶은 참 잔인하다. 여러모로 모든 생명이 잔인함을 준다. 이 모순된 세상에는 고통의 흐름이 소용돌이치며, 각 영혼에는 끓어오르는 긴장이 있다. 모든 인간은 죄가 있다고 현자들은 말한다. 카르마에 대한 빚은 우리가 갚는다. 삶은 고통이다. 내 다음 생 삶은 돌이 되고 싶다. 모든 심장 박동, 소리 없는 간청, 무감각하고 나무처럼 가만히 있는 것. 죄 많은 생물은 환생한다고 하였다. 인간은 죄 많은 생물이기에 다음 생엔 환생할 것이다. 그것은 곧 고통이다. 그것은 지옥이다. 다 갚지 못한 카르마가 있으면,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 인간이란, 많은 죄짓고 사는 생물이라, 아무리 봉사하여도 다 못 갚는다. 못 된 난 이번 생은 글렀다. 그러니 내 다음 생 중 개, 돼지가 되는 것 보단, 돌로 태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다음 생엔 돌이 되고 싶다. 많은 건 바라지 않는다. 거듭나고, 환생하고, 생을 거듭하고, 끊임없는 기쁨과 투쟁의 순환 속에서, 그러나 내가 이끌고 싶은 돌의 삶은 느낄 고통도 없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카르마도 없다. 슬픔에 면역인 바위의 심장은 오늘과 내일도 두렵지 않다. 인간의 영역에서 일은 단지 게임일 뿐이고, 덧없는 명성을 위해 보상을 쫓는 것. 성취와 자부심에 대한 비뚤어진 추구, 이 수고와 문제 속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한다. 인간은 일이라는 것을 게임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변태다. 일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성취감과 보상. 월급 또는 승진,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일이 게임이라니, 그래서 내가 게임을 싫어하고 정말 지지리도 못하나 보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다 해도 무엇이 유익한가? 덧 없는 기쁨, 일시적인 이득, 모든 월계관에는 그림자가 드리우고, 모든 성공에는 실패가 피어난다. 삶은 잔인한 농담인 것 같다. 인내의 시험, 끈질긴 탐구. 그러나 이 모순 속에는 다음과 같은 주제가 있다. 목적의 실, 숨겨진 꿈. 아마도 돌은 소리 없는 힘으로 마음의 진정한 시야에는 매력이 없다.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머물고, 삶의 진통 속에 영혼이 거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대극장에 서 있다. 날마다 노력하고, 살아남는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툼에도 불구하고, 삶이라는 참 어이없는 것에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끝
카르마
죄와 슬픔의 세상에서 우리 카르마 바퀴가 돌고, 해가 뜰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그러나 돌의 모습을 갈망한다. 감정의 손길이 결여된 삶,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인간의 고통 중에서 돌처럼 고요하고 고요한 마음, 인생의 쓴 약에 흔들리지 않는다. 노동 게임, 기술 게임, 빈 칭찬과 주머니가 채워진다. 그림자를 쫓고, 시간를 쫓고, 한 푼도 아끼지 않는 세상에서. 월급은 영혼을 달래는가, 아니면 또 다른 통행료인가? 잔인하고 냉혹한 역사의 교훈, 우리 마음에 영원한 흔적을 남겨준다. 그러나 이 잔인한 농담의 중심에는 역설이 조용히 쉬고 있었다. 우리가 고통을 겪을수록, 우리는 더 많이 발견하고, 숨겨진 힘, 탄력 있는 마음이 더 커지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 인생은 힘들고 종종 잔인하다. 그리고 인간은 연약한 도구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불꽃이 밝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가장 어두운 밤을 통해 우리를 인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칭찬은 따끔거릴 수 있고 일은 고갈될 수 있다. 인생은 끝없는 사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분명히 볼 수 있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롭다는 것을 말이다. 죄와 슬픔을 통해 우리는 길을 찾고, 매일 더 강해지고 있다. 돌은 쉴 수 있고, 무감각하고, 차갑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의 잔인한 게임 앞에서 우리는 일어나고, 넘어지고, 우리의 주장을 걸고 있다. 이 혼돈 속에서, 이 난폭한 탈것을 결국 탄다. 우리는 전세를 역전시킬 힘을 삶 속에서 여전히 찾고 있다.
끝
차갑고 고요한 돌조차도 풍차의 깃펜의 스릴 그리워한다.
존재의 물레 속에선 슬픔이 끈질긴 끈기와 만나는 곳, 바람 속삭이는 소원과 불안이 없는 돌이 되기 위해, 그러나 절망 앞에서도 인생의 잔인하고 쓰라린 올무에서, 숨겨진 힘, 비밀스런 힘, 가장 어두운 밤에 타오르는 불. 일과 놀이, 묘한 가식, 추구하는 보상, 칭찬, 휴식이 없는 게임, 인생의 끊임없는 탐구를 추구한다. 찬양할 때마다 속이 빈 반지, 모든 업적에서, 덧없는 것.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 빛이 비치고 있다. 깊은 밤의 등대는 인생은 힘들고 인생은 불공평하며 욕망과 정욕의 끝없는 순환, 하지만 이 공포와 투쟁의 미로 속에서 더 풍요로운 삶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차갑고 고요한 돌이라도 풍차의 깃펜의 스릴을 그리워하고 태양의 온기, 달의 부드러운 노을, 삶의 썰물과 흐름의 기쁨이 역사의 아픔의 메아리 속에서 그 경멸의 그늘에서, 옛것과 새것 모두 거짓된 진실, 투쟁을 통해 우리는 갱신한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거친 바다 위에 서 있다. 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우리 마음 속에는 열쇠가 있다. 흐름을 바꾸고 진정으로 존재하기 위해.
끝
수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나타나는 어둠의 영역에서, 우리는 조용한 방에 있다. 우울한 공기가 뒤덮고, 안개 낀 구름 속의 우리 마음, 우울감이 살금살금 기어오른다. 조용한 속삭임에 미묘하게 스며든다. 밤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모든 광원을 가린다. 비관주의는 손을 뻗고 서서 인생의 모래 속에서 그것을 확장한다. 그것은 세상을 아주 짙은 그늘로 칠하고, 그리고 깊고 지속적인 흔적을 남긴다. 마음을 가로질러 소란이 휘몰아친다. 자연의 현상금에서 유령은 부패한다. 푸른 들판, 푸른 하늘, 염세주의자의 흐릿한 눈을 통해 본, 사회의 번잡함, 밀물과 썰물, 공허한 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기쁨이 어울리지 않는 무대, 슬픔의 공간에 반갑지 않은 손님. 그러나 깊고 광대한 이 슬픔 속에 고난의 과거에서 씨앗이 솟아난다. 희미한 희망, 작은 휴식, 밤에 깜박이는 촛불. 슬픔의 흙에서 힘이 뿌리내리고 슬픔의 쓴 열매에서 회복력이 피어난다. 땅에 닿는 모든 눈물 속에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울증, 그것이 엮는 무거운 수의,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마음은 믿는다. 깊은 그림자 속에서 영혼은 빛을 찾고, 그리고 다가올 싸움을 준비한다. 끝없이 기억한다. 밤이 길어도, 모든 마음에는 노래가 있다. 용기, 회복력, 사랑과 환희, 우리 고유의 가치에 대한 증거가 있다.
끝
뚝심 있게 철학자 중 쇼펜하우어를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 서로는 우울증 앓고 있다. 우리는 염세적이다. 우스갯소리로 불교를 믿자고 한다. 어디서 듣기론 불교에선 환생이 죄지어서 그 카르마를 갚는 거라고 한다. 이번 생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이번 생은 글렀다고, 담 생엔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고 묻는다. 난 돌이 되어 심해어 구경한다고 하니 내 친구 왈, ‘먹구름 해 난 비가 될게. 세계 구경하면서 깡다가 슬픈 날엔 비가 되어 줄게’ 내 친구는 그 어여쁘게도 말하고는 한다. 또 다시 하늘로 올라가 먹구름이 되어 같이 있자. 난 내 친구의 이 말이 너무 예쁘게 다가와서 눈물이 났다. 근데 사실 친구야 난 뚝심 있게 심해어 구경하고 싶어, 인간은 현생에 너무 많이 구경하고 있는걸. 근데 난 네 말이 너무 위로가 되었어.
끝
선량한 사람
선량할수록, 그런 사람이야말로 머리가 정말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정말 어려운 것이 그것이야. 평범하게 선량할 순 있어도, 마치 재능이라도 부여한 거처럼, 천재처럼, 선량한 사람. 그 선한 사람 한 명으로 이 사회에서 역량이 크다는 것을 안다. 선한 사람은 그저 서 있고 참나무가 너무 웅장하다는 것을 안다. 마음과 정신, 비옥한 땅. 친절하고 현명하며, 자신 입장을 똑바로 취하는 아름다운 눈동자, 부드러운 손길로 남을 인도하고 있다. 덕은 아침 해와 같이 빛나고, 곱게 엮은 사랑의 다채로운 선 염색사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이다. 이 조직은 날실을 팽팽하게 건 곳에 색 씨실을 무늬의 색에 따라 꿰매 가듯이 짜 넣는 평직 변화조직이다. 지능, 그의 길잡이 별, 그것은 가까운 곳과 먼 곳, 모두에서 그의 길을 밝혀주었다. 여정이 험난할지라도, 마음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것은 강력하고 진실하며 순전히 정당하다. 가장 깊이 신뢰하였다. 착함이라는 다이아몬드, 그지없던 천재는 아마도 그 자체로, 순수하고 밝은 통찰력을 타고났다. 광채는 결코 그의 은혜를 가리지 않는다. 친절은 영혼의 진정한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조류를 탐색하고, 신뢰할 수 있는 안내자로서의 공감과 함께. 자연의 영역에서 자신의 평화를 찾고, 불안한 생각이 달콤한 해방을 찾는 곳. 폭풍이 몰아치고 바람이 불더라도 마음에는 끊임없는 빛이 있다. 바다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등대, 평온의 안식처. 나는 어쩌면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 일반적으로는 왕이나 황제가 그의 지방 중 한 곳을 방문할 때 사용한 공식적인 구약성서에는 성막의 영광스러운 구름과 그 외에도 여호와의 사자, 진설 병, 언약궤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 안에서 발견했다. 어쩌면 자신의 친절한 마음 비추는 거울이 각각의 사랑과 은혜의 행위에서, 우린 자신 잠재력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모든 사려 깊은 말에서 중얼댔다. 영혼이 중얼거릴 정도로 친절하게, 좋은 사람의 가치는 제한될 수 없었다. 단일 마음의 좁은 영역으로. 선량한 사람은 천재인 것을 부정 한다면, 원시적 시대로 돌아가 말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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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인지 몰랐을 때 쓴 글
나는 긴장되면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그럴 때, 내 심장이 다 들린다. 그 심장 소리를 잘 귀 기울여봐라. 그러면 긴장을 즐길 수가 있게 될 것이다. 또 긴장을 푸는 방법은 두 손으로 입을 가려 숨을 몇 번 내쉬고 마셔봐라. 나는 내 곤경의 이름을 알기도 전에 밤처럼 어두운 두려움의 순간 내 머리는 유령처럼 하얗게 변하고, 기억이 흐려지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것은 어떻게 행동하나 의미가 있다. 내 가슴 속에서 북이 치고, 쉼 없이 거친 리듬. 귓가에 울려 퍼지는 맥박, 크고 맑은 긴장감의 노래. 이 리듬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들었다. 두려움을 대담하게 바꿀 수 있었다. 비트, 드럼, 불안한 마음의 고동에. 휴식, 머나먼 꿈, 그러나 손이 닿는 범위 내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양손으로 입을 막고 두려움을 내쉬고 남쪽으로 갔다. 술 마시기 전, 잠시 멈추었다. 자연의 법칙에 맞추기 위해. 폭풍을 진정시키는 의식, 형성하는 제어의 유사성을 가졌다. 장애의 이름을 알기도 전에. 패닉이 임상적 틀에 의해 길들어지기 전에, 이것은 춤, 계속되는 게임, 늘 같은 불안의 비트라고 느꼈다. 이제 지식으로 명철했다, 세상은 덜 두렵고 덜 까다롭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순간에 거칠고 자유로운 더 강한 자신을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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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아이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는 그것이 나중에 이자가 큰 사채가 불어 마음은 아이인 어른이 된다. 내 염세주의는 그렇게 찾아온다. 아이는 커서도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 아이가 조용하다고, 아이가 어른들 눈치 본다고 아이가 어른스럽다고 좋아하지 말라. 역겹다. 그만큼 어른이 아이에게 어른스럽게 행동하라고 모방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아이는 아이답게 성장하고 성장통을 겪어야 아이이며 비로써 어른일 때 아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모방 자체를 안 좋게 보는 게 아니다. 아이는 모방한다. 그러면서 큰다. 하지만 강요한 모방은 독이다.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쑥쑥 자란다. 아이는 강요와 같은 한숨과 함께 어른으로 변한다. 시간의 빠른 비행이 낳은 역설과 황혼에 휩싸인 어린아이 같은 어른에게 비관이 스며들고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르고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사라지면서. 갚아야 할 청춘의 빚, 어른들의 세계에서 홀로 있다. 너희들을 혐오한다. 그런 주제에 그렇게 조용한 아이를 너 따위들이 경멸하다니, 그 어른 아이가 된 내가 또다시 그런 어른이 되어 경멸한다니, 아닌가. 경멸보단 동정이다. 타인에 대한 혐오는 자기 자신 혐오 투영이라 했던가. 즉 동족 혐오다. 그 아이는 어른의 세계의 폭동을 감지하는 자다. 젊은 모습으로 성숙함을 경멸하기 위해, 자연의 눈으로 본 부자연스러운 행위. 어른을 흉내 내도록 강요받은 아이, 침묵의 항의로 그들의 결백이 날아갔다. 잔인하지 않은가, 이 도둑맞은 젊은 아이가, 쓰라린 진실을 간직한 손실을 말이다. 아이는 아이다. 아이는 넘어지게 하고, 자라게 해야 한다. 그리 성장하는 것이, 바로 아이다. 아이 시간에,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놀이이다. 성숙을 서두르는 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소중한 것을 훔치는 행위다, 삶의 일부, 느낄 수 있는, 기회. 성장통, 기쁨, 두려움, 이것은 젊은 시절의 선물이다. 그러니 아이는 아이다워야, 진정하게 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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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 찬스
좋은 기회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아이가 물건을 던질 때 이 아이와 관계를 개선할 수 있겠구나. 이 아이를 도와줄 수 있겠구나 해결할 수 있겠구나. 이것이 나이스 찬스란 걸 당신은 모른다, 감정이 격할수록 좋은 기회다. 감정 격한 순간이 좋은 기회이다. 그 기회가 인생의 장엄함과 광대하고 무시무시한 아이의 장난감이 날아갈 때가 아닌가, 일을 바로잡기 위해 개입할 기회다. 형성해야 할 유대감, 성장해야 할 신뢰, 그런 작은 행동에서 사랑이 흐를 수 있다. 돕기 위해, 인도하기 위해, 해결하기 위해, 이 춤에서 모두는 진화한다. 감정이 생생할수록 기회는 더 풍부해진다. 복잡한 삶의 춤에 동참하기 위해. 눈물과 웃음과 기쁨과 다툼 속에서 생명의 바로 그 씨앗을 거짓말해야 한다, 감정적인 순간, 그게 핵심이다. 이해하기, 공감하기. 우린 창문을 제공하고, 아주 순수한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사랑이 유혹하는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이 덧없는 기회는 신호에 불과 한다. 연결, 깊고 신성함. 그러니 이 순간을 붙잡자, 기다리지 말자, 그들 안에 우리의 집단적 운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생생하고, 진짜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고, 치유하고, 느끼는 법을 배운다. 따라서 우리는 각 상호작용에서 하나의 간단한 작업의 힘을 하루하루 배워간다. 이것은 어른이 우리에게도 포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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