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 대한 집착 버리기
미국 대학교의 학점 체계는 A+가 아닌 A부터 시작한다.
학부시절 나는 A를 못 받을 것 같은 과목은 전부 드롭했던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그 이유는 편입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뉴욕대학교를 다니던 나는, 조금만 학점 관리를 하면 '아이비리그' 학교로 편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목표를 2학년 1학기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땐 그 학교 타이틀이라는 게 그렇게 커 보였나 보다. 많은 친구들이 한국에서 재수, 삼수 중이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는 많은 수업들을 드롭했다. 우리 학교 학비는 일반적으로 1학점에 2천 불(한화로 약 270만 원)인데, 이 말인즉슨 3학점 수업을 드롭하면 800만 원가량의 돈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성적이 낮은 수업을 드롭하는 대신 평균 학점을 높이는 것과, 내가 뉴욕 길바닥에 그대로 버리게 되는 학비를 비교했을 때, '아이비리그 편입에 성공하면 이 돈은 별거 아니겠지'라는 마음으로 드롭을 선택했었던 것 같다.
코로나가 터지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편입에 대한 생각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편입이 물 건너간 대신 우리 학교 조기졸업을 하기로 했다. 여름학기, 겨울학기를 꼬박꼬박 채워 수강신청을 했고, 연세대 교환학생을 하면서도 최대 학점으로 수업을 들었다. 물론 이전에 드롭한 수업들은 "Credit-by-exam"이라는 제도로 잘 메꿨다. 수업을 수강하지 않았어도 기말고사 성적이 좋으면 학점을 대체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제도와 프로그램을 잘 조합해서 결국 3년 만에 뉴욕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뿌듯한가? 분명 뿌듯하다. 하지만 직장생활과 실무를 하다 보니 아쉬운 점들이 있다. 분명 대학생 때는 '조기졸업하면 세상이 날 다르게 보겠지'라고 생각했었지만 말이다.
제일 아쉬운 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했던 압박감 와 시간에 쫓기게 만드는 부담감이었다. 혹여나 내가 조기졸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의 수가 생길까 봐 당시 어드바이저였던 Julie와 그렇게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이메일 답장을 기다리며 밤을 새운 적도 있다. 몸은 한국에 있는데, 모든 정신은 미국 학교 상황에 있었다. 실질적으로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조기졸업 서류를 준비하느라 과제나 시험의 우선순위를 미룬 적도 많았다. 어쩌면 내 능력을 초과하는 일이었는데 내가 억지로 강행했나 싶을 정도로 불안했고, 스트레스를 몰아서 받았다.
일반적으로, 대학교 3학년(삼 학년 - 혹은 '사망'년..)은 자유로운 1, 2학년 때와 달리, 본격적인 학점 관리와 취업 준비를 시작하는 시기이다. 나는 3학년 때 4학년까지 감당해야 할 책임을 전부 짊어졌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커리어를 밟고 싶은지 계획하는 과정이 부족했다. 그래서 졸업 후에 어느 정도의 방황을 했고, 4학년이 고민해야 할 것들을 졸업하고서야 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이 많이 아쉽다. 같은 고민도 '대학생'의 신분으로 하는 것과 '백수'의 신분으로 하는 것은 고민을 뒷받침해 주는 여유의 양과 질이 다르다.
또한 코로나와 맞물려 충분한 학생회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쉽다. 나는 기독교 동아리, 국제학교 학생회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고, 아카펠라 동아리와 오케스트라 동아리의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유가 더 많았다면, 코로나가 없었다면.' 이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교류하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게 되었을 텐데. (내가 전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약 1년의 기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려는 나의 본능일 뿐이었다. 사실 나는 외향성과 내향성이 적절히 섞인 인간이라는 것을 꽤나 최근에 인정했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모두 나의 과거 결정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달해 온 현재의 나는 어느 정도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개발자라면 time complexity (시간 복잡도)라는 개념과 익숙할 것이다. 어떤 알고리즘의 성능을 표현하는 지표 중 하나인데, 컴퓨터로 알고리즘을 실행했을 때 얼마나 빠른지를 추상적으로 측정하는 것이다. 컴퓨터 분야 외의 이공계 분야에서도 숫자로 측정하는 효율, 성능의 지표는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우리는 숫자를 놓아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계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는 페이스 조절을 알아서 하지 않는다. 1 아니면 0, 모 아니면 도이다. 결국에 숫자는 보이는 내 타이틀일 뿐이다. 내가 아이비리그로 편입을 하고 싶어 했듯, 조기졸업을 하고 싶어 했듯. 효율이 좋듯 보이는 상황들을 들여다보면 무언가를 놓치고 있기 마련이다. 보여지는 나를 위한 것인지, 혹은 보여지지 않아도 나에게 떳떳할 수 있는 것인지 항상 체크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