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태껏 혼자 살아본 적이 없었다. 집을 떠나
타지로 간 대학교에서는 룸메와 함께 기숙사를 썼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회사에서 지원해 준 집에서 룸메와 함께 지냈다. 넓지 않은 공간을 타인과 공유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배려심이 필요했다. 룸메와 성향이 안 맞거나 생활 패턴이 맞지 않아도 참아야 했다.
그런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갈증이 커져갔다. 작은 골방이라도 상관없었다.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오롯이 내 물건만 있고
내 취향으로 꾸밀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그런 내게 홀로 지낼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재작년에 다른 근무지로 발령 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곳에서는 혼자 쓸 수 있는 기숙사(라고 쓰고 원룸이라 부른다)를 준다고 했다. 본가와도
가까운 위치였기에 나는 주저 않고 신청을 했고
그해 말 발령이 확정되었다. 관리팀에서는 카톡으로 여러 집을 기숙사 후보로 보내주었다. 사진보단 직접 가서 눈으로 보는 게 낫다는 동생의 권유로 나는
2시간 동안 기차에 몸을 싣고 그곳으로 떠났다.
기차역에서는 먼저 도착한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부동산 업체를 방문하고 실장님과 여러 집을
다니다가 세 번째 만에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그곳은 다른 집보다 넓고 깨끗했으며 무엇보다
안전한 집이었다. 그 집은 주황색으로 가득했다.
주방도 주황색, TV 선반도 주황색, 옷장까지도 주황색이었다.
눈이 펑펑 오던 그해 겨울, 나는 주황색의 향연인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먼저 도착해 계신 아빠, 엄마, 동생이 짐 푸는 걸 도와주고 나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주었다. 엄마는 우리 가족의 새로운 아지트가 생겼다며 좋아하셨다. 여태껏 늘 룸메랑 같이 살아서 내
공간에 가족들이 올 수 없어서 정말 아쉬웠는데 이젠 언제든 올 수 있으니 내 맘이 정말 편했다. 앞으로는
가족끼리 모일 때 이곳에서 모이면 된 것이다. 마침
본가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렇게 갈망하던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 나는 여태껏 하고 싶던 집 꾸미기에 들어갔다. 우선 이 집과 어울리는 침대와 책상을 구매했다. 침대 프레임을 구매할 때 전반적인 인테리어 느낌을 염두하고 골랐고, 책상도 크기와 위치를 생각하며 구매했다. 이사 오고 며칠 동안은 집 앞에 산타할아버지가 왔다 간 것처럼 택배 상자가 선물 꾸러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물건을 채우고 나만의 짐으로만 가득한 집을 보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자유란 이런 것인가!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했다.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어서 퇴근 후 책을 빌리러 자주 갔다. 이런 소소한 일상 자체가 정말 행복했다. 도서관 근처에 사는 삶이라니.
꿈꾸던 삶이었다.
새로 산 책상 위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 독후감상문도 썼다. 잔잔한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맥주에 야식을 즐기기도 했으며 업무 상 필요한 공부를 하기도 했고, 내 생각이 담긴 글도 써 내려갔다. 로맨스 드라마를 보면서 혼자 설레발을 치다가 편백나무 향이 가득한 침대 프레임의 향기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가족들도 찾아와서 함께 음식도 해 먹고 티비를 보며 수다를 떨었다. 침대와 책상을 둬도 넉넉한 공간 덕분에 아빠, 엄마도 편히 계실 수 있었다. 가족들과
집 근처 알아둔 맛집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호수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마주친 버스킹의 관객이 되어 휴대폰 플래시를 흔들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들과 소중하고 예쁜 추억을 많이 쌓았다.
그리고 나의 지인도 몇몇 다녀갔다. 중학생 때 만나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오고 있는 오래된 친구부터 초등학생 때 다녔던 미술학원의 선생님까지 소박하지만
앙증맞은 나의 주황 세계에 입장을 마쳤다.
그렇게 애정을 두고 추억을 만들어갔던 곳을 1년 만에 떠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이사를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의 짝을 만났고 그분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집을 비우게 된 것이다.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짐은 또 왜 이리 많은지. 기존에 살던 집과 신혼집이 그리 멀지
않아 내 차로 짐을 다 옮겼다. 처음엔 자잘한 짐부터
옮겼고 이후로 부피가 큰 물건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공들여 골랐던 침대는 동생의 집으로 떠났고
스터디 카페였다가 때로는 분위기 좋은 바, 도서관이 되어주던 책상은 신혼집으로 이사를 갔다. 커다란 짐들이 빠져 텅 빈 공간을 보니 왠지 모르게 서운하고
눈물이 나왔다. 이곳에서 지냈던 지난 1년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새로 이사 와서 설렘에 가득 찼던 나날, 피곤에 찌든 채 방바닥에 눌어붙어 그대로 잠들었던 날, 가족들이
놀러 와서 복닥복닥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주말...
그 모든 추억들이 떠올랐다. 이 집에 정이 든 것이다. 내 생에 처음 가졌던 나 혼자만의 공간이었기에 더
소중했고 그래서 더 애착이 갔다. 그런 이 집과 이별을 앞에 두니 복합적인 감정이 몰려왔다.
결혼을 하여 더 좋은 신혼집으로 가는 것도 좋지만
왠지 나의 추억을 이곳에 두고 가는 느낌이 컸다.
회사에는 이번 주까지 방을 비우겠다고 말씀드린 터라
어제 마지막으로 짐정리를 하러 다녀왔다. 짐을 챙기면서도 헛헛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이제 가족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나의 집은 추억 속으로 저물었다.
혼자만의 취향으로 꾸몄던 작고 소중한 정든 나의 집도 추억 속 한 장면이 되었다.
주황빛으로 가득했던 나의 추억들을 접어두고 나는
이제 신혼집으로 떠난다. 떠나기 전 이 집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다.
너를 만나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고.
네 덕에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남기고 간다고.
나에게 소중한 기억들을 남겨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이다. 앞으로 이 집에 이사 오게 될 새로운 분도
이 집에서 예쁜 기억들을 많이 만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