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48시간처럼 살다가 휴직으로 인해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니 어떻게 하면 그 소중한 시간들을 좀 더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을까 여간 고민이 아니다. 회사 다니느라 시간이 없어 배우지 못했던 많은 것 들 중에 뭘 배워볼까? 100세 시대라는데 인생 2막을 위해 뭔가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막상 이런 고민을 하다가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하면 누굴 가르쳐야 할 나이에 뭔가를 배울 생각을 하니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다. 하긴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몇 년 전 졸업을 앞둔 제자가 진로 상담을 하러 왔는데 인생에 대해 자신감 없고 비관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녀가 한 말 중 가장 어이없었던 것은 ‘저는 뭘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요’ 라는 말이었다. 그때 그녀는 24살이었다.
2000년대 초반 <오페라 페스티벌>을 기획할 때 일이다. 당시 출연할 성악가를 한, 중, 일 오페라가수 중에서 선발하기로 결정하고 오디션을 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출장을 갔었다. 중국측에서는 공식적인 회의를 위해 조선족 출신의 통역사을 준비해 주었다. 그런데 그 통역 아주머니는 나이도 좀 있으시고 외양은 허름했지만 중국어와 한국어를 완벽히 하셔서 회의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날 스케쥴이 일찍 끝나서 기분 좋게 시내 관광을 하려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그 통역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를 관광할 계획인가요?”
“글쎄요…홍코우 공원에 가 보려구요.”
“가는 길 알아요? 같이 가 줄까요?”
통역 아주머니와 나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65세이며 우리나라로 치면 외교부에 해당하는 정부부처의 국장 출신이고 조선족 출신으로는 최고위직에 오른 여성이었다는 것, 아들은 북경에서 의사이고 딸은 홍콩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는 등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낸 어머니라는 것…정말 사람은 외양을 보고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달았고 타국에서 인텔리 여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 나의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럼 퇴직 이후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렇게 중국어, 한국어 통역도 하고 일어 통역도 하고 있어요.”
“어머나 일어도 하세요?”
그녀는 한창 일할 50대 초반 일본과 관련된 업무를 할 때마다 일어 통역을 하는 부하직원에게 일일이 물어보며 일해야 하는 것이 답답해서 그때부터 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52살에 시작했던 일본어 공부가 지금은 통역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통역 아주머니를 만났던 그때 내 나이 30살 이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도 난 무언가를 새로 배우기엔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주저될 때마다 상하이에서 만났던 그 통역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친구들에게 또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때 우리는 그저 다시 시작해 보라고 가벼이 조언하곤 하지만 막상 자기 자신에겐 어떠 했던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 할 때 자신이 없어서, 나이가 많아서, 수많은 이유로 주저 하지 않았던가. 단언컨대, 무엇을 새로이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더구나 이 여름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엔 딱 적당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