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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an 01. 2024

24년, 암막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

23년의 모든 것이 지나가고, 지금 여기 남아 있는 '나'에게



2024년 첫 아침이다. 암막 커튼 사이로 미세하게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본다. 

'제게도 2024년을 허락하셨네요. 감사합니다.'


2023년의 마지막 날을 보낸 것이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득히 먼 옛날 처럼 느껴진다. 해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2023년을 돌아봤다. 1월에는 자궁근종 수술했다. 생각보다 아팠고 서러웠다. 4월에는 담당 의사로부터 '이제 다 괜찮다. 병원에 또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6월에는 시험관 시술 전 마지막 여행으로 시부모님과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7월에는 시험관 시술이 어그러지고,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빠졌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에 지난달 갔던 해외여행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다시 끊었다. 사실 6월의 여행은 혼자가고 싶었다. 왠지 당분간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서. 혼자보단 시부모님과의 여행을 선택했다.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생긴 것이다. 기대했던 기회가 날라가고,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혼자 여행이다. 4년만인가. 



일본 다카마쓰의 쇼도시마라는 작은 섬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에어비앤비를 운영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 가족은 저녁마다 나를 초대했다. 간장 국수, 오코노미야끼.. 소박한 밥상에는 정성이 담겼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주 4회 오픈, 그마저도 12시-4시까지 운영하는 이상할 정도로 느린 카페다. 자기들만의 속도로, 조급하지 않게 살아간다. 서울에서 온 나로선, 생경했고 꿈꿔왔던 삶을 어떻게 실현하며 사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외부의 에너지가 아닌, 나의 에너지로 살아야겠다' 


2023년의 반이 지난 시점에, 나의 삶의 에너지가 전환되는 기분이었다. 



8월 시험관 시술을 진행했다. 튼튼하고 어여쁜 아기가 무럭무럭 자기의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다. 17주까지 불면의 연속이었다. 불면의 바닥엔 온 몸으로 겪은 불안이 자리잡고 있었다. 작년 7월 17주의 아기를 보내야했다. 손 쓸 틈 없이 양수가 터졌던 그날의 기억, 태아를 배출하고 오열하던 그날의 기억이 몸 속 구석 구석에 새겨져있었다.  23년, 찾아온 아기와 17주를 지나는 동안 몸이 기억하는 불안을 견뎌야했다. 무사히 17주가 지나고 20주를 넘기며 불안은 사그라들었다.

'이것이 트라우마라는 것이구나. 온 몸에 새겨진 기억이란 것이 이것이구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23년의 끝자락에서 한 해 나의 굵직했던 사건들을 돌아봤다.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수치심에 치를 떨기도 했으며, 기쁜 소식을 듣고 행복했고, 불안을 통과하느라 지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갔다. 그 모든 사건과 생각과 감정 중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뒤의 '나'만 여기 남아 있다. 



아, 그렇구나. 그때의 그 사건과 생각과 감정은 내가 아니다. 그것과 나를 동일화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엔 그것이 영원할 것만 같았고, 그것이 나 인줄만 알았다. 그러니 많이 아팠겠구나. 힘들었겠구나.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뒤의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좀 더 깊은 곳엔 아득한 우주가 있다. 그 우주 안엔 사랑하는 신이 있겠다. 그 신이 나의 2023년을 함께 지나왔구나. 모든 고통과 눈물과 열등감과 수치와 행복과 즐거움 속에 그 신이 함께 있었구나. 내가 몰랐구나.


2024년의 아침에 암막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을 마주한다. 햇살은 늘 그자리에 있었다. 암막커튼을 친건 그 누구도 아니고 '나'다. 암막커튼을 치건, 활짝 열어 재끼던 햇살은 거기에 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총이다. 온 몸과 마음을 열어 햇살을 받아들이고 싶다. 아니,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공짜다. 암막 커든을 닫을 때도, 열 때도 햇살은 공짜다. 그 햇살은 우리 안에서 동일하게 비추고 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쳐 놓은 암막커튼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 24년, 마음을 열어야겠다. 암막커튼을 활짝 열고 쏟아지는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겠다. 또 어떤 사건과 생각과 마음이 나에게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괜찮다. 모든 것은 지나갈테니. 그리고 늘 그자리에 있는 신이 나와 동행할테니. 나는 그저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면 된다. 끊임없는 에너지로 사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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