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낮은 햇살 속에서 걷는 일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나른한 오후의 점심시간, 30분의 짧은 여유 속에서 걷는다는 건 그날 하루를 온전히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을 준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몸은 늘어지고, 집중력이 흐려지기 쉽지만, 가을의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걷는 일은 기분을 전환하는 데 그만이다.
점심을 간단히 마치고, 나는 회사 근처의 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단풍잎이 붉고 노랗게 물들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 걷기의 묘미다. 날씨 탓인지 10월의 중턱을 넘었지만 올해는 아직 단풍이 시작되지 않는다. 하지만 길게 뻗은 나무 아래로 떨어진 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그 소리가 마치 계절의 속삭임처럼 느껴진다. 꼬리를 세운 청설모들은 심심한 아저씨를 반겨준다.
경주 황성공원의 청설모
길을 걷는 동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발을 옮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가을 햇살 아래 여유로운 걸음으로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들. 삼삼오오 직장인들과 운동을 나온 어르신들,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같은 길을 걷고 있겠지만, 가을이 주는 위안은 누구에게나 똑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30분 동안은 복잡한 업무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다.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오늘은 구름이 조금 있다. 잔잔한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나는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 더 가벼워진다. 가을 하늘은 유독 높고, 그 끝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작은 고민들이 그 앞에서는 한결 작게 느껴진다.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은 서늘하지만, 그 바람 속에는 어떤 따뜻함도 숨어 있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인간도 조금씩 변한다는 걸 느낀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업무들이 머릿속을 스칠 때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을 잊고, 발길 가는 대로 걷고 싶다.
짧은 시간이 끝나갈 즈음, 나는 공원의 끝자락에 도착한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가을의 여유로움은 잠시지만, 이 걷기는 오후를 살아갈 힘을 다시금 채워준다. 30분의 걷기가 주는 상쾌함과 가벼움은 마치 가을이 내게 주는 선물 같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나는 매일 이 길을 걸으며 조금씩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루하루를 새롭게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