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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영 May 01. 2024

우주에서 가장 작은 블랙홀에서 쇼핑을

  왜들 그래? 블랙홀 속에서 쇼핑 정돈 할 수 있잖아?

      나의 침대는 매트리스커버부터 이불, 베개까지 검은색 잉크에 푹 담갔다가 뺀 듯한, 진하디 진한 검은색을 띤다. 나는 내 침대를 좋아한다. 침대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 어?라고 말할 테지만, 진한 검은색으로 뒤덮인 나의 시크한 침대를 보고, 누워 검은색 베개를 베고, 검은색 이불을 엎으면 멋들어진 침대에 누워있다는 생각에 자아도취에 빠질 정도로 나의 침대의 분위기를 사랑한다. 내 검은색 침대에 누워 있으면, (대중적인 혹은 조금 더 어두운 편일지도, 파운데이션 23호도 밝다고 느낀다. 아무튼,) 흔한 동아시아인의 피부톤을 갖고 있는 나는 꽤나 도드라져 보인다. 단지 명도 대비가 확실하니 당연한 일이라 그렇다. 그렇지만 난 내 침대에 혼자 누워,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마음껏 만끽하며 가만히 누어 있는 게 좋다.


   이런 소소한 행복도 내 우울이 나를 삼키는 걸 막지 못했다. 내가 사랑했던 침대에 누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숨 쉬는 것이 나에게 일이 되어, 그걸 해내는데 온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우울에게 처참히 무너진 날, 무의미한 연차를 내고 침대에 누었다. 전날부터 누어 ‘여전히’ 누워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가깝겠다. 나에게 세상의 주인공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 나의 진한 검은색 침대는 더 이상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물체는 끝도 없이 추락하도록 설계된, 우주에서 가장 작은 블랙홀이었다.


  무기력한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인간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 탯줄이 타인에 의해 끊어진 그 순간부터 멈추면 안 되는 ‘호흡’이란 중대한 일을 하는데 열중했다. 우주에서 가장 작은 블랙홀에 누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여긴 우주가 아니란 걸 반증하듯이 중력이 나를 짓눌렀다. 그냥 중력이 날 아래로 당기면, 당겨지는 데로 그대로 중력을 받아들인 체 우주에서 가장 작은 블랙홀 속으로 끝도 없이 떨어졌다.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데, 기껏 한 일이 모든 알람이 꺼져있는 내 핸드폰을 열어 검은색 블록처럼 생긴 ‘무신사’, ‘크림’ 앱을 클릭한 일이었다. 그 검정 블록 너머에는 수천 개의 옷, 신발이 있었다. 이번 시즌 새로 나온 신상품, 시즌 오프 할인 상품, 그리고 이제 구하기 어려워 리셀로 올라온 옷과 신발들이 내 이목을 끌었다. 저 이쁜 옷을 입고 싶었다. 저 멋진 신발을 신고 싶었다. 세상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길거리를 누비고 싶었다.



그 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에서 물욕 넘치는 인간이 되었다. 참 잘했다고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사는 것이니 너그러이 넘어가주길 바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예쁘고 멋진 아이템들을 찾아, 머릿속으로 매칭해 가며 멋들어진 나를 상상한다. 난 아주 잠깐 동대문에서 옷을 떼다가 의류 쇼핑몰을 운영한 적 있어, 그때 독학한 얄팍한 지식을 이용해서 옷의 재질, 박음질, 그리고 제조국을 따져가며 합리적인 옷인지 판단했다.


상품 후기를 낮은 순부터 차례대로 읽어가며, 옷의 장단점과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옷인지 , 핏과 옷매무새는 어떤지 꼼꼼하게 살핀 후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의 장바구니에 들어온 옷과 신발은 쟁쟁한 경쟁에서 고르고 골라 선별된 아이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덜컥 모두 다 구매하지 않는다. 승리를 거미쥐는 아이들은 타 사이트와 가격, 배송 경쟁에서 승리한 아이들이다. 그 관문을 통과한 제품들에 한해서만 나의 노동과 맞바꾼다. 이 절차가 이루어지는 동안만큼은 내 무기력이 달아났다. 비록 내 통장은 쪼그라들었지만, 난 무기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이 즐거움에서 감내해야 할 일은 두 가지 미래의 내가 또다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과 배송 온 택배를 뜯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택배가 문 앞에 쌓여있는 게 왜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일인지 모른다. 어플 속 장바구니에서 구매를 하면, 잘 세탁되어 내 옷장으로 고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삼삼오오 잘 포개어져 언젠가 멋지게 입고 거리에 나서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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