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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영 May 26. 2024

오키나와 바다에서 쇼펜하우어

짧은 글

오키나와에 온 지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해가 난다. 공허함과 우울이 또다시 스멀스멀 나를 덮쳐 오던 중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이 나미노우에 해변으로 향해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심지어 청승이란 청승은 다 떨면서 울면서 걸었다.


바다에 비치타월을 깔고 누워 가방을 베개 삼아 그리고 주위 상점의 레게 음악과 바람에 의해 일렁이는 바닷소리를 벗 삼아 쇼펜하우어를 읽었다.


슬프고 우울할 때 쇼펜하우어라니.


비가 보슬보슬 오길래 그냥 맞다가 탈모 걱정이 되어 우산을 비치솔처럼 펴두고 누었다. 발로는 모레를 실컷 느끼면서 송글 솔글 맺히는 땀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기며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비가 오지 않고 그 자리엔 해가 얼굴을 내 밀었다. 여전히 우산은 그대로 쓰임만 바뀌어 강열한 햇빛을 가려주며 그 자리에 있다.


행복하다. 인생에서 아마 손에 꼽히는 행복이겠지. 가장 저렴하지만 내가 여태 이토록 바라던 행복이 이곳에 있었다. 이제야 내가 새것 보다 헌 것을 사랑하는 이유도, 꾸며진 거보다 자연스러운걸 사랑하는 이유도, 빌딩 숲에 갇혀 숨이 멎을 것 같은 이유도 얼핏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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