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어느 추운 겨울산에서
아, 운명아! 너는 어떻게 나와 인연이 닿은 것일까. 내가 너를 기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너의 병치레를 몇 개월 동안 하면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이 야릇한 감정과 묘한 사랑을 담으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너를 통해 나를 느끼고 너를 통해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나는 정말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위주로 했던 삶이 차츰 주변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너의 눈길로부터 나는 포로가 된 듯싶다가도 너의 내부로 빨려 들어간다. 소용돌이 같은 우리의 만남, 너와 나의 동거는 정말 뜻밖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인연이라는 말을 조심스레 하는가 보다. 그래, 어쩌면 나는 오래전부터 고양잇과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너처럼 사부작사부작거리다가도 갑자기 새침데기 같고, 조용한 것 같다가도 털 털 털고 일어난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주변 산책길에서 만난 이 작은 생물은 그야말로 불쌍하기 이를 데 없다. 꼬질꼬질하고 기침과 콧물과 심한 피부병이 어우러진 채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가 아주 심상치 않다. 고양이는 사람들이 다니는 작은 오솔길에서 몸을 똘똘 말고 있다. 어찌 보면 공 같기도 하고 토끼 같은 생물이 사람들 바짓가랑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무릎으로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아무도 받아주는 이는 없다. 고양이가 자신의 구애를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행동이 잠잠해질 무렵 벌써 해는 넘어가고 찬기운이 산을 덮고 있다. 나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안절부절못한다. 아, 진즉 나도 사람들 따라 내려갈걸 살짝 후회도 한다. 누군가 나에게 "그 아이 데려다 기르세요"했지만 나는 오히려 덜컥 겁부터 났던 게 사실이다. 내가 고양이를 기른다고요? 아,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운명아 이를 어찌하리.
그러나 정말 인연이란 잠깐의 눈 마주침에도 묘하게 끌리는가 보다. 불쌍한 고양이를 서로 떠 넘기듯이 하고 사람들이 떠나간 뒤에도 내 마음이 무척 아팠다. 현실로 돌아와 보면 그냥 기억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옳았다. 그날 산책길에서 만난 어린 고양이가 참 불쌍했더라고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었노라고 말이다. 그러나 등 돌리고 걷는 내내 어찌나 눈에 밟히던지 내려오던 길을 되돌아 다시 가 볼 수밖에 없었다. 어둑한 길에 공처럼 동그랗게 앉아있는 고양이는 누군가 발로 툭 건드리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그날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는 것도 너무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산에 올라 고양이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코로나가 동물들에게도 번진다는 뉴스가 나오던 때라 사람들은 고양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다가가는 것을 우려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서서 조심스레 고양이 상태를 한 동안 지켜본다. 가래 때문에 사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 불쌍한 생명도 한때는 누군가의 품에서 행복함을 주었겠지. 어린 생명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날 멀찍이서 그렇게 확인을 하고 또 돌아왔지만 분명한 건 고양이의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는 것이다. 아, 용기 없는 인간에게 신이시여 용기를 주소서. 나의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을 용서하소서. 나의 기도가 용기가 되었던 것일까. 드디어 나는 결심을 한다. 뒷 일이야 어찌 되었건 고양이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올 겨울이 위험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마치 내 아이를 험한 곳에 내버려 두고 온 엄마처럼 말이다.
어느새 너는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결심을 하고 산을 오르는 그날 발걸음이 무척 바쁘다. 나는 딸과 함께 또 산을 향한다. 이번에 만난다면 정말 데리고 오는 거다. 그렇지만 만약에 너를 못 만난다면 우리는 인연이 없는 것이므로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다. 부담감을 털어내 듯 스스로 약속을 한다. 대충 고양이가 들어갈 수 있는 가방과 장갑을 챙겨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캣맘이 밥 주던 자리를 지나가는데 고양이가 없다. 나는 그때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일단, 나는 노력은 했노라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막상 결심을 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고양이를 질색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큰 일을 저지러는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적인 만남은 정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딱 마주쳤다. 마치 하산하는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그 자리에 떡 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 어찌나 놀랍고도 반갑던지 나도 모르게 "자, 이제 집으로 가자"하고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이 나왔던 것일까. 마치 그것이 정말 내가 해야 할 일이었던 것처럼 너를 데리고 가야 하는 내 임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것처럼 말이다. 너도 내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앞서 종종 걸어간다. 가다가는 내가 잘 따라오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말이다. 생각보다 몸짓이 큰 너는 가방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아서 품에 안고 길을 걷는다. 아, 이제 어쩌지! 병원에 들러 집까지 가는 거리가 왜 이리 불편할까. 나는 딸과 함께 작전을 짜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일에 동참을 했지만 너를 집 안에 들이기까지 또 어떤 바람이 불어올까.
내가 사는 시인의 숲에는 예고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잦다. 가끔은 무성한 잎들이 하늘을 덮어 낮이어도 캄캄한 날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상큼한 바람이 아니어도 가끔은 흔들리는 바람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길에서 만난 뜻밖의 인연과 함께 거룩한 숲으로 입성하는 날, 이미 어두컴컴한 하늘이 내려 안고 있다. 큰 나무 뒤켠 어딘가 움푹 들어간 그곳에 이동장을 넣어두고 입 싹 닦고 남편을 본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다. 힘들어도 이동장에서 절대 나오면 안 된다. 알겠지. 너도 내게 힘을 실어줘야지!. 잘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