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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숲 Aug 21. 2023

너를 데려온 건 정말 잘한 일이야

어제와 다른 특별한 오늘 




앞으로는 너의 발걸음이 내가 사는 숲에 콕 콕 찍힐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네가 넘지 못할 문턱은 없을 것이며 네가 머리를 원 없이 비비면 비빌수록 너는 무한대의 땅을 차지할 것이다. 아무리 둔탁하고 고집스러운 뿌리 짙은 편견도 넘어가리라. 그러나 아직은 나의 숲엔 이리 눈발이 성성하고 바람이 불고 기세가 등등한 말들이 오간다. 너도 기억해라. 이 낯선 곳에 처음부터 너의 영역을 쉽게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나 또한 지금부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자가 된다.  너의 존재를 누설할 찬스를 기다린다. 너와 나의 밀어는 안쓰럽고도 달콤하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치른 거사에 대해 타당성을 찾으려 애쓴다. 어떻게 하면 남편을 설득할 수 있을까 기회를 엿본다. 그래,  이 아이를 데려 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 그렇지. 딸과 하이파이브를 한다. 이럴 땐 딸과 나는 천상 동지다.  가끔의 의견 대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의기투합을 한다. 근심과 걱정의 잎이 뚝 뚝 떨어지는 긴 긴 밤이여 어서 가고 숲의 아침이 활기차게 밝아오기를. 우리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며 결연한 동지의식을 느낀다. 


굿모닝! 잘 잤니. 

너를 격하게 맞이하지 못하고 후미진 구석을 내주어서 정말 미안하다. 첫 밤을 두렵게 맞이했을 너의 놀란 동공이 생각나서 나도 내내 밤을 밝혔다. 그래서 이 아침, 내가 건넨 첫마디엔 미안함이 많이 묻었다. 나를 바라보는 천진스러운 얼굴은 오랜 만남처럼 낯설지 않다. 그러나 나의 숲 속은 어제처럼 늘 컴컴하고 낯선 곳은 아니란다. 다만 인내심이 강한 사람만이 맛보는 낙엽의 손이 된다면 이 또한 나쁘지 않으리라. 나는 바람 한 자락을 끌어다 일기를 쓴다. 오늘의 향기는 누군가 내게 보낸 선물 같은 날이라고.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어쨌든 남편을 설득해야 한다는 임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마음먹으면 기회는 오는 법이다. 마침 저녁 식사를 끝내고 동네를 한 바퀴 돌자는 남편의 말에 오호 쾌재를 부른다. 여기서 절호의 찬스를 잡아야 한다. 사실, 남편의 제안은 화해의 기류 같은 것이다. 며칠 전 말다툼을 해서 어색했지만 선의의 제안을 뿌리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나는 마음으로 카운트 다운을 하듯 기회를 엿보다가 슬쩍 아주 불쌍한 길냥이를 보았노라고 얘기를 꺼낸다. 길고양이와 겨울과 병치레와 죽음에 관하여 뭐 이런 이야기를 얼버무렸던 것 같다. 무슨 죄를 지은 것인지 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나.


그런데 그 고양이를 내가 데려왔다고 말을 꺼내자마자 남편은 무척이나 놀란다. 뭐라고? 소리만 지르지 않았을 뿐 화난 얼굴이 달빛에도 어린다. 어떻게 자기랑 상의도 없이 함부로 병든 고양이를 데려왔냐는 것이다. 자기는 고양이라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누차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러더니 걸음을 멈추고 왔던 길을 돌아 휑하니 사라졌다.  혼자 남아 서 있는 밤, 무심한 달빛에 젖어 벤치에 앉았다. 자칫 하다가는 또다시 냉기류가 될 판이다. 지금 우리는 매우 조심하고 있는 중이니까. 그래도  정도 화내는 거면 다행이다. 이때만큼은 부부싸움도 약이 되는지 무슨 배짱인지 그냥 두둑하다. 


숲의 기류가 바뀌었을까 봐 조심스레 문을 연다. 우르르 쾅 쾅 내분이 일 것 같던 집 안은 조용하다. 휴우~앓던 이가 빠진 듯 마음이 후련하다. 남편의 몇 가지 제안을 넙죽 절하며 받아들인다. 남편 왈, 자기 눈에는 절대 띄지도 말라. 절대 거실로 나와서도 안된다. 그래도 이 엄포는 감사하다. 이렇게 너와의 동거는 어렵사리 시작되었다. 나는 너를 위해 방 하나를 넙죽 내준다. 그런데 너는 넓은 공간을 내주어도 마다하고 의자 한쪽에 몸을 맡긴다. 초라해 보이는 종이박스에 몸을 구겨 넣고 베란다 햇살에 흠뻑 젖는다. 행복한 졸림을 나도 따라 한다. 비로소 네 곁에서 스르르 잠이 든다. 그동안 너무 곤했다. 사실.


그런데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게 된다는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고양이 울음소리만 나도 싫어하던 남편은 한 달이 지나면서 스스로 고양이가 있는 방문 앞을 기웃거린다.  남편이 처음  방문을 열어 본 아침에 너는 어찌나 반갑게 뛰쳐나오는지. 남편의 얼굴에서 번지는 웃음을 그때 처음 보았다. 그때부터 너는 당당히 걸어 나와 거실에서 안방으로,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활개를 치며 다니기 시작한다. 퇴근하는 남편은 현관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우리 아들 어디 니 하며 너부터 찾는다. 꼬리를 흔들며 뛰어와 남편의 손에 안기는 너의 모습이 우리 집 풍경이 될 줄이야!  네 덕분에 뻑뻑했던 겨울숲에 사랑의 윤활유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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