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비둘기 Nov 14. 2022

프랑크푸르트

독일의 오래된 소도시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기억은 드문드문하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이제 유럽 여행의 기억은 너무 희미해져서 장면 장면이나 이미지만 부분적으로 떠오를 뿐이다. 당시에는 매일매일이 그렇게나 강렬한 경험이었는데 이제는 마치 한때 읽었던 소설 속 장면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당시 나는 공책 한 권을 챙겨 가 거의 매일 밤마다 호스텔 침대 머리맡에서 일기를 썼었다. 아마 그 일기장을 들춰보면 잊었던 많은 기억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걸 본다면 이야기가 좀 더 다채로워질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컨닝하는 기분이다. 그건 일기장의 기억이지 지금 나의 기억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 일기장에 경험과 기억을 적은 사람이 과거의 나라 해도, 지금 내게 그것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것을 내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다. 당시의 내가 여행하며 느낀 것과 지금의 내게 정제되고 변색되어 남은 잔상들은 많이 다를 것이다. 괜히 그것을 읽었다가 과거의 나에게 의도치 않은 영향을 받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톰 리들의 일기장을 읽었다가 엄청난 수렁에 빠지는 해리 포터처럼 되고 싶지는 않달까. 일기장이란 대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혹시 이깟 아무 말을 진지하게 읽으신 분이 있다면 사과드린다).


또 일기장이 본가의 내 방 어디엔가 처박혀 있어서 거기까지 가서 찾아야 한다는 번거로움도 있다(인정한다, 사실 귀찮다).     



Unsplash @timoune



프랑크푸르트는 작고 조용한 도시였다. 마인 강변과 뢰머 광장 근처를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가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한다고 알고 있어서, 어쩌면 그네들 입장에서는 제법 큰 도시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뻔뻔하고 거만한 서울 촌놈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구 천만에 육박하는 메갈로폴리스에서 평생을 산 사람의 눈에는 웬만하면 다 작아 보인다.     


프랑크푸르트에 숙소를 두고 하이델베르크를 당일치기로 다녀왔었다. 사실 하이델베르크는 다녀온 기억이 몽땅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별 거 없는 곳이었는데 그 조그만 대학 도시에 감도는 분위기와 공기가 좋았다. 하이델베르크 성에도 들렀다. 고즈넉하고 고색창연했다. 다른 것보다, 중세풍 성의 모습이 당시 푹 빠져 있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의 배경에 들어온 것 같아서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방송되기 전이었다. 메모리카드를 잃어버려 이때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게 아쉽다.

뉘른베르크도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벽돌이 많은 옛날 마을이라는 흐릿한 이미지 외에는 별달리 남은 것이 없다.

로텐부르크는 가려 했었는데 못 갔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지만 구태여 끄집어 내기에는 구차한 이야기들이다.     



하이델베르크는 이런 느낌이었다. Unsplash @Matt Eberle



프랑크푸르트에는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유럽 여행 처음으로 한인 민박에 묵었는데, 한국인들뿐이라 편하긴 했지만 색다를 것은 없었다. 나는 사실 굳이 외국에 놀러 가서 한국인이 우글대는 민박에 묵어야 하나 하는 입장이라 재미가 없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참고로 나는 1년 동안 김치를 한 번도 안 먹어도 아무 문제없는 매국노 입맛을 가지고 있다. 본가에서 김장 김치를 한 포기 정도 얻어오면 다음 해 김장을 할 때까지 남아 있을 때도 많다.     


여하튼 민박집에는 출장차 프랑크푸르트에 방문한 아저씨들이 몇 있었는데, 우리를 귀엽게 봐 주신 덕택에 프랑크푸르트 시내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도 데려가 주셨다. 외국에서 된장찌개를 먹으려면 한국 돈으로 만 오천 원 정도는 든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이후에 우리 넷은 그분들과 어느 저녁엔가 민박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와인도 잔뜩 마셨는데 다들 거나하게 취한 기억밖에 안 남아있다. 개중 한 분은 나를 제수 삼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멋쩍어하면서 본인의 동생 분은 이미 서른이 넘었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만 나이 스물 하나였는데. 어이쿠.      


뭐, 어디 가서 생판 모르는 아저씨들과 술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을까 싶어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냈다. 그렇지만 몇 년 뒤 사회생활을 시작하자 생판 모르는 아저씨들과 술자리를 함께 할 기회는 넘쳐났다. 하하.


매거진의 이전글 암스테르담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