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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Dec 26. 2022

오랜만에 심란한 날

언니와의 여행?

    요즘은 대체로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정리해야 할 마음과 뱉어 내야 하는 생각이 없어서 굳이 글을 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건 좋은 일일까 아닐까. 아무튼 오늘 글을 쓰고 있다는 건 오랜만에 심란한 날이었다는 뜻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본가에 다녀왔다. 일 년에 딱 하루, 제발 성당 좀 가라는 우리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날이다. 초에 불을 밝히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고, 성탄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나누면 크리스마스라는 게 실감이 난다. 성당 사람들이 언니를 대하는 것을 보는 일도 좋다. 이사 오고부터 계속 같은 성당에 다녔으니 지금의 성당에 다닌 지 19년이다. 언니는 성당 공동체에서는 낯선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언니에 대해 알고, 언니에게 편하게 말을 건다. ‘루시아(세례명) 오늘 성가 참 열심히 불렀다.’며 따뜻한 칭찬을 건네기도 한다. 유아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녔지만 도무지 신앙이 생기지가 않아 초등학교 5학년 때 ‘할머니가 믿는 걸 왜 나도 믿어야 해’ 라며 대판 싸우고 냉담 중인 나이지만, 이런 다정들이 모여 이루어진 게 종교라면 믿을 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사함에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누르며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게 혼자만의 연례행사다.

    하려던 얘기로 다시 돌아오자면, 할머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시다. 수능이 끝나고 할머니와 바티칸에 다녀왔었다. 교황님이 계신 성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수녀님들과 인사를 나누며 할머니가 정말 행복해했고, 돌아와서도 한참을 유럽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셨었다. 그게 참 좋았어서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도 보여드리고 싶었다. 이번 겨울에 할머니와 둘이 스페인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여름의 코로나 이후로 기운 회복이 덜 된 할머니는 지금은 아직 멀리 갈 상태가 아니라며 거절했고, 옆에서 듣던 엄마가 ‘그럼 나랑 가자’며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엄마가 ‘너희 언니를 데려가는 게 마음이 편할 텐데’라며 셋이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내 한 몸 겨우 챙기는 유럽 자유 여행에 엄마와 언니를 데려가는 게. 언니는 당연히 한 마디도 못할 텐데. 엄마도 해외 자유 여행은 처음이라 가이드 없는 여행에 익숙하지 않을 텐데. 전부 내가 감당해야 할 텐데. 손이라도 놓치면 어쩌지. 그렇지만 휴가 날짜를 알아본다며 들뜬 엄마를 보니 언니를 데리고 해외여행은 못 가겠다는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그리고 언니와 해외여행을 가는 건 나도 꿈꿔왔던 일이기도 하니까. 2019년 칸의 해변에서 가족들에게도, 특히 언니에게도 이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막연히 꿈꾸는 것과 당장 두 달 후의 일정으로 들이닥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숨이 턱 막히는 부담감이었다. 출근해서 일정을 한번 봐야 한다고, 다음 주에 이야기해주겠다며 대화를 끝냈다. 


    엄마와 언니를 대동한 유럽 자유 여행. 생각만 해도 너무 힘들고 지치고 불안하다는 마음과 엄마가 저렇게 들떠하는데 이 꽉 깨물고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충돌했다. 이 고민을 의지할 만한 사람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러자니 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최근 새롭게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언니에 대해 말해야 할까? 말한다면 언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에 대해 이해받기 위해서는 언니의 지적장애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전까지는 이미 우리 가족에 대해 알던 사람을 만나 왔어서 이런 상황이 처음이다.


    굳이 말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아직 뭐 결혼을 바라보는 사이도 아니고. 겨우 한 달 만난 사람에게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나. 그리고, 상대방이 안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랐던가. 언니 선물로 캐릭터 인형과 드로잉북을 고르는 나를 보며 ‘조카 선물이야?’라고 물었었다. 너는 어떻게 그걸 까먹어. 왜 이걸 몰라.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을 텐데, 다 알지만 그 순간의 실망감과 서운함은 제법 오래갔다. 그 순간 ‘아니 언니 거야. 나 조카 없잖아.’라고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려버린 나에 대한 자괴감도 함께했다. 그러니까, 알아도 달라질 게 없는데, 굳이 말해야 할까. 하지만 반대로, 알아도 달라질 게 없다면 알리지 않을 이유는 또 뭔가. 부끄럽니? 아니 딱히 부끄럽진 않은 것 같아. 그보다는 무서워. 혹시 이 사람이 언니를 이유로 나를 덜 좋아하게 될까 봐. 그때 받게 될 상처와 실망감이 너무 무섭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언니에게 미안하다.


    이럴 때는 S를 찾게 된다. 비슷하게나마 내 고민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냥 말하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되나 싶어. 애인도 아닌데. 내 애인이 힘든 순간에 나보다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싫을 거다. 떠올려지는 사람의 애인이어도 싫을 것 같다. 미안합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자중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잔뜩 심란한 하루…. 주절주절 써버렸으니 푹 자고 일어나면 좀 정리되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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