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이 다른 아픔이 있어요. 얼마나 애써왔어요. 맞고 아프고 이런 것만 상처가 아니라 어릴 적에 받아야 할 것, 심리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걸 못 받은 것도 엄청난 상처예요. 혜은 씨도 힘들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해야 부모님을 대하는 마음, 언니를 대하는 마음을 풀어나갈 수 있는 거예요."
사실 그냥 듣기에 좋은 말이라 생각했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상처만 쓰다듬고 있는 건 너무 유치하다고, 나와 같은 아픔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내 아픔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안 하겠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으면서도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따뜻한 위로의 말에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라는 어리고 못난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서 마지막 시간에 선생님께서 나와 비슷한 것을 (아픔도, 경험도 적당한 단어가 아닌 것 같아 그냥 이렇게 쓴다) 안고 살아가고 있다며 본인 얘기를 해 주셨을 때 그렇게나 눈물이 났나 보다. 그동안 해주셨던 말씀들이 생생한 당사자성을 가지고 새롭게 다가와서, ‘그럴 수 있다.’, ‘그게 당연하다.’ 하신 말씀이 전문가로서 위안을 건네기 위한 말이 아니라 깊게 우러난 공감임을 알게 되어서. 조금 부끄럽고 크게 위로받아서 한참 울기만 했던 것 같다.
정작 그때는 왜 우는지도 모르고 그냥 울었다. 순간순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름을 붙여 주기가 어렵다. 이유를 모르고 좋아하고, 우울해하고, 그러다 한참 뒤의 어느 순간에 ‘그때 나는 그래서 울었구나’ 알게 된다. 나는 뭔가 다 좀 느리다. 이제야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은 점을 포함해서 그렇다. 상담을 받으면서, 그동안 내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부분들이 사실은 말하고 싶은데 누구에게 어디에 털어놓아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조각조각 나서 본인도 깔끔히 정리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들을 병렬적으로 늘어놓으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을 앞에 두는 건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일이니까. 그런 부담을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늘 그런 사람이 필요했나 보다. 내 두서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안아줄 사람, 나를 신경 써줄 사람.
상담실 문을 나오면 당장 오늘 내 일정도 챙기기 어려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 써주는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다. 당장 나부터 여러 친구의 이야기를 세세히 기억하고 마음 쓰지 못한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남에게 바랄 수는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를 잊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하면서도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말하고 잊히는 게 말하지 않는 것과 뭐가 다를까. 오히려 더 나쁘지는 않을까. 나는 말할 때마다 착잡한데, 한 번에 기억해주지 않으면 나는 또 속상하게 말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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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이라면 여기서 글을 끝냈을 것 같다. 말했지만 사라진 것들로 말하지 않은 것들을 덮으면서. 하지만 지금은 지금이니까, 예전과는 같지 않으니까 조금 더 쓴다. 내가 말하고 싶다는 걸, 사람을 마주하고 말해야만 해소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까, 속상해하면서도 마저 쓴다.
내 언니는 지적장애가 있다. 언니를 부끄러워했다가 그럼에도 언니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가 나는 언니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느꼈다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결코 언니를 미워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있다. 어릴 적부터 혼자서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나라도 걱정 안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일상처럼 해와서, 어린애를 그런 생각을 하게 내버려 둔 부모님이 가끔 원망스럽다. 자주 오는 언니의 전화를 의무감에 받고는 전화기 너머의 언니가 답답해서 화를 내기도, 가끔은 전화를 피하기도 한다. 언니와 함께 살아갈 미래를 상상할 때마다 너무 두렵고 막막해서 운다. 언니를 책임지는 건 생각만으로도 벅차지만, 동생에게 책임을 전부 맡기고서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이걸 나만 누리고 있다는 죄책감이 스미고, 그래서 가족이 있는 본가에 갈 때마다 내가 잘해야지 다짐하지만 끝내 짜증을 내고 돌아온다.
상담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 살짝 놀라는 눈치로 ‘상담에서 무슨 얘기를 하냐’고 묻던 친구들에게 항상 ‘뭐 이런저런 얘기 다 하지’라고 말해왔는데 사실은 이런 얘기들을 했다. 물론 이게 내 전부는 아니다. 이런 종종의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태평한 대학생으로 잘 지낸다. 하지만 이게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건 더더욱 아니라, 기억해주길 바라게 된다. ‘나를 신경 써줘, 나 힘들어, 나를 서운하게 하지 말아 줘’라는 유치하고 미운 바람을 네 살에 채우지 못해서 스무 살이나 더 먹고서야 말해본다. 이 마음을 채워야 앞으로의 마음을 풀어나갈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 선생님 말씀을 핑계 삼을 테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잊어버리면 서운해할 거다. 그렇지만 조금만 서운해하고 다시 말해줄 거다. 몇 번이라도 속상해하면서 말해줄 거다.
당신도 똑같이 해주면 좋겠다. 내가 미안하게도 당신의 이야기를 잊어버렸을 때, 조금만 서운해하고 살짝만 속상해하면서 다시 말해주면 좋겠다. 같은 종류의 ‘것’을 가진 상담자를 만난 건 보편적인 상황이 아니라 행운이라 봐야 할 것이고, 모두가 서로에게 당사자성을 가진 위로를 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음을 닫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 나누다 보면 공감 비슷한 것을 건넬 수는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건 분명히 위로가 될 거라고 믿는다.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당시 수기의 흐름에는 맞지 않아 뺐던 부분이 있어요. 내담자에게는 상담이란 게 하나의 주제를 단단히 잡고 간다기보다는 알 수 없는 대화의 흐름을 타고 가다 보니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이잖아요. (물론 선생님은 훌륭한 상담자이시니까 그 속에서 주제를 발견하셨겠지마는, 당시 제가 느끼기에는 그랬다는 말이에요) 언니 이야기를 많이 하긴 했지만 중간중간 진로 고민도 많이 이야기했었죠.
"저는 상담을 못 하겠어요. 상담자가 되겠다고 심리학과에 오긴 했지만, 1학년 때 깨달았어요. 나는 상담을 못 한다는 걸. 저는 제가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도 두려운데, 어떤 영향을 주는 것도 너무 두려워요. 제가 뭐라고."
- "자기의 영향력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상담자보다는 자기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상담자가 훨씬 나아요. 혜은 씨는 이미 상담자의 자질이 있어요."
상담 수기를 적던 대학생은 상담자가 되었어요. 저는 공감 비슷한 것을 건네고 있는 걸까요. 저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걸까요. 무서운 마음은 여전하지만, 선생님이 그때 해주신 말씀을 떠올리면 조금은 힘이 납니다. 일교차가 크네요 선생님. 따뜻한 외투를 챙겨 다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