엮고 보니 죄책감이었던 것들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언니와 내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이니 초등학교 4학년 이전이겠다. 학교를 다녀와 식탁에 앉는 나에게 할머니가 말했다.
“아까 너희 언니가 그러더라, 장애인은 팔다리 없는 사람들 아니냐고. 자기는 장애인이 아닌데 왜 애들이 자기한테 장애인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뭐라 대답을 못 하겠더라. 언니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리다. 언니도 불쌍하고 너희 엄마도 불쌍해서 마음이 그렇다.”
왠지 눈물이 났고, 또 왠지 참아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아무튼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겠다며 화장을 조금씩 시작하던 시절.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려는 나를 보면서 할머니가 말했다.
“예쁘네. 너희 언니도 멀쩡했으면 한창 꾸미고 놀러 다닐 나이인데….”
또 왠지 눈물이 났고, 또 또 왠지 참아야 할 것 같았다.
할머니는 저 얘기를 나한테 왜 했을까? 단순히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스몰토크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하는 넋두리였겠지. 할머니는 저런 이야기를 했던 걸 기억도 못 하고 있을 거다. 그런데 나는 왜 지나가는 말 한마디를 10년이 넘도록 기억하고 있을까.
상담을 받을 때 위 이야기들을 하면서 울었다. 어떤 맥락도 없이, 그냥 너무 오래 마음에 남아있는 말들을 뱉어 내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였던 것 같다. 또 무슨 얘기를 했더라.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병렬적으로 내뱉으면서 울었다.
칸의 해변에서 혼자 납작복숭아를 먹고 술을 마시며 생각했다. 아, 너무 행복한데. 비현실적으로 행복한데…. 근데 나만 여기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할머니는 평생 이런 곳에 못 와보고 살았는데, 엄마 아빠, 언니도, 높은 확률로 이 행복한 풍경을 못 보고 살 텐데. 나만 여기에, 엄마 아빠 돈으로, 행복하게.
2019년의 하루는 너무 슬퍼져서, 도무지 혼자 있고 싶지가 않아서, 충동적으로 숙소를 잡고 당시 만나던 애인을 무작정 불러냈다. 영문도 모르고 불려 나온 애인은 밤새 나를 꼭 안아줬다. 따뜻했고, 고마웠고, 언니 생각이 났다. 언니는 애인의 이런 따뜻함을 모르고 살겠지. 그냥 그게 슬펐다. 내가 누리는 걸 언니는 경험할 수 없다는 게.
상담선생님이 말했다.
“힘들었겠네요. 가장 좋은 순간에도 마음 한 켠에서는 죄책감을 느끼는 거잖아요. 그런 걸 계속해왔던 것 같고요.”
- “… 언니가 비장애인이었다면 아마도 대학을 왔을 거고, 연애도 했을 거고….”
“교환학생도 갔겠죠. 상담도 받고. 혜은 씨처럼. … 그런데 언니한테 물어봤어요 안 행복한지? 언니는 언니의 행복이 있어요. 아마 혜은 씨보다 언니가 훨씬 행복할지도 몰라요. 일도 안 해, 공부도 안 해, 얼마나 좋아. 언니의 행복을 혜은 씨의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말아요.”
내가 모르는 삶, 내가 모르는 행복. 언니뿐 아니라 그게 누구 일지라도. 모두에게 각자의 삶이 있고, 그건 정말이지 서로 달라서 그 속의 행복과 불행을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을, 내 삶 속의 행복을 가진 것이 죄책감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내 삶’을 가진다는 건 필연적으로 언니에 대한 책임을 밀어내는 일이었고,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었다. 평생 가장 멀리 갔을 때, 한국을 떠나 교환학생을 갔을 때 내가 가장 홀가분하고 행복했던 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보낸 여름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두 번째로 상담소를 찾아가게 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언제쯤 죄책감 없이 내 삶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 이게 아니다. 언제쯤 언니도 가족도 내 삶이라는 걸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서울의 혼자 사는 20대로서의 삶도 내 삶이고, 발달장애인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삶도 내 삶이라는 걸. 내가 싫어하거나 좋아하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인생에는 취사선택이 없다는 걸. 그러니, 어차피 내 삶의 모든 면을 살아내게 될 테니 지금의 ‘개인적인 삶’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는 걸. 언제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