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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Jul 02. 2024

심란함의 이유

    1) 이 학생은 병원 연계까지는 안 해도 되겠다고, 계획대로 종결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한다고? 왜 지금까지 이 부분을 살펴볼 생각을 안 했을까? 겉으로 드러나는 작은 불안이 있으면 그보다 크고 넓은 불안의 본체가 당연히 있을 거라는 걸 왜 캐치하지 못했을까? 이런 일이 왜 발생하냐는 보호자의 질문에는 왜 더 당당한 전문지식으로 대답하지 못했을까? 오늘의 세 번째 상담이 끝나고, 피곤함도 못 느낄 만큼 자괴감이 들었다.


    2) 어제의 사고 소식과 피해자들의 연령대를 접하고 큰 슬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이 너무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 하루하루 더 행복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사고로 아무런 전조 없이 하늘나라로 간다면 그때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상상하다가 눈물이 났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겠지만.. 고인의 명복과 유족의 회복을 마음 다해 빌었다.


    3) 물론 가해자는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이때다 싶어 쏟아지는 노인혐오 발언은 눈살이 찌푸려진다. 운전면허 발급 기준을 강화하고 정기적인 갱신 검사 혹은 시험을 통해 운전실력이 검증된 사람이 운전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방향성에는 물론 동의한다. 그런데 어떤 커다란 사고의 가해자가 노인이라고 해서 '노인네들 면허 다 뺏어야 한다'라는 말이 바로 나오는 건 너무 거칠거칠 사포 같은 사고의 흐름 아닌가. 틀딱도 면허 반납하고, 김여사도 면허 반납하고, 청장년층 남자만 도로에 남았다고 치자. 그 도로에서 40대 남성이 사고를 낸다면 그때는 그 나이대 남자들 면허 다 반납하라고 말할 건가? 노인층이 운전미숙 사고를 많이 내니까 당연한 거라고? 40대 남자들과 노인층을 비교할 수는 없다고? 그러면서 특정 범죄 가해자의 압도적인 성비를 지적하면 하나의 요소를 공유했다는 이유로 모든 집단 구성원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지 말라고 말하고? 너무 모순적이지 않나? 몇 문장만 적어봐도 엥 싶을 정도로 눈에 띄는 모순을 너무나도 부드럽게 소화해 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4) 아 전셋집 주인 분께 전화하기는 왜 이렇게 싫을까. 계약서고 확정일자고 전세 대출 연장이고 생각하고 싶지가 않은데 생각뿐만 아니라 해결까지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점이 너무 진 빠진다. 억지로 억지로 전화를 드렸더니 모레부터는 여행을 가신다고 내일 계약서에 도장을 찍자고 하신다. 계약서는 당연히 내가 준비해 가야 한다. 어쩌겠냐 해내야지. 아무 말 더 안 얹고 계약 연장하는 게 행운인 줄 여겨야지. 알겠다고 퇴근 후에 뵙자고 하고 내일 저녁 약속을 취소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는 날이 미뤄지는 게 슬펐다. 내 사정으로 약속을 변경해 놓고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적반하장으로 징징거리고 있는데도 들어주는 사람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애정과 안정이 있는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유아퇴행은 정상이라지만 이런 내 모습이 싫다. 요즘 찰리푸스의 'Hero'라는 곡에 빠져있는데 곡 중에 'I don't need a hero. I don't want to be saved'라는 가사가 있다. 입에 착착 감겨서 따라 흥얼거리지만 요즘 내 마음은 정 반대다. 누가 나를 이런저런 일상의 책임으로부터 좀 구해주면 좋겠다. 막상 다 놓으라면 놓지도 못할 나를 알기에 이런 마음이 어이없고 웃기다.


    5)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았나, 자기는 정말 안심되는 사람 아니면 이런 얘기 안 한다고. 그간 쌓아온 라포가 이제야 빛을 발한 거다. 핵심적인 이야기를 지금 들었다고 해서 그 전의 모든 회기가 쓸모없는 회기가 되는 건 아니다. 이전 회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중요한 회기가 존재하는 거다. 그리고 기존에 내가 나아가려던 방향성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세상은 위험하고 나는 나약하다고 생각될 때 위험한 세상을 통째로 바꿀 수는 없는 거고 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가는 게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그 불안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내담자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오늘에야 조금 제대로 안 거지. 아, 상담이 늘어야 되는데 자기 위안이랑 변명만 는 것 같다.




    이유 없이 심란하다고 생각했는데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니 마음이 안 좋을 이유가 제법 있다. 더 정리해서 조금 더 완성된 글로 써볼까 싶기도 한데, 일단 오늘은 오늘의 생각대로만 공개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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