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주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테일러가 따뜻한 체온을 느낄 때 까지 둘은 말없이 앉아있었어.”
흰 색 바탕면지에 한 뽀글머리 소년과 토끼가 폭 끌어앉고 있는 그림이 참 인상적인 그림책 “가만히 들어주었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다. 언젠가 도서관에 갔을 때 저 포근한 표지에 반해서 마치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양 품에 안고 집으로 왔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이 눈에 들어왔던 건,나도 당시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포옹이 필요한 힘든 순간을 지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힘든 터널을 지날 때 우연히 만난 그림책은 내게 큰 위안을 준다.
책 속 주인공 테일러는 공들여 쌓은 쌓기나무 탑이 실수로 무너지자 크게 상심한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닭, 곰, 코끼리 등 다양한 동물들이 찾아와 나름의 방식으로 테일러를 위로하려 든다. 대부분 무슨 일인지 캐묻거나 조언을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테일러는 모든 게 성가신지 위로를 거부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다. 그러다 토끼가 조용히 테일러 옆자리에 앉는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어떤 말도 캐묻지 않고, 섣부른 조언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렇게 자신의 곁은 내어주고는 테일러가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토끼의 인내심있는 행동에 마음의 문을 연 테일러는, 그제서야 토끼에게 마음에 담아둔 속상함을 조금씩 내어놓고, 토끼는 가만히 그 말을 들어주며 어깨를 내어준다. 슬픔에 빠진 누군가에게 어떤 위로를 하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책의 주인공 아이에게 가만히 나를 대입해본다. 그러다보니 곁에서 가만히 들어주는 역할인 토끼와 겹쳐지는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4년 전 내가 교직생활에서 힘든 고비를 넘고 있을 때 자신의 곁을 내어주며 가만히 들어주던 유일한 분. 나에게는 토끼같던 존재. 바로 몇 년전 나의 부장 선생님이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년도, 나는 30개월을 갓 넘은 아들을 두고 복직을 했다. 2년간의 휴직 후 복직이라 나름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 하던 어느날, 한 학부모의 전화를 받은 뒤로부터 내 가슴 위엔 늘 무거운 돌덩이 하나를 얹고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을 함에도 불구 그 학부모는 자신의 속에 울화가 가득찬 날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내 귀에 여과없이 욕설을 퍼부어댔고, 나는 담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검은 언어들을 힘없이 온몸으로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다른 일들로 작년 선생님들과 사이에 소송이 두 건이나 걸린 터라 그 화풀이는 오롯이 내게 전해졌다. 아무 잘못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나는 어느 새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있었다.
매일을 그렇게 울며 가시밭길 같은 날들을 힘겹게 걸어나가던 그 시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그 어둠의 터널에 불을 밝혀주신 분은 바로 부장님이셨다. 이미 그 학부모에 대한 일을 너무 잘 알고 계시던 터라 거의 매일같이 우리 교실을 들러 내 동태를 살피셨고, 힘든 표정을 내비치면 늘 이런 식으로 말을 건네며 굳게 잠긴 내 말문을 스르륵 열게 만드셨다.
“자기, 힘든가보네. 그럴 땐 바로 퇴근하지 말고 우리 교실에 들러서 내게 다 털어놓고가, 집에 가자마자 귀여운 4살 아들한테 그런 표정 보이면 안되니까.” 나는 그 말에 둑이 터진 양 설움 섞인 말들을 쏟아내었고, 한 시간은 족히 넘는 그 시간 동안 부장님은 시종일관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내 눈빛을 자신의 따스한 눈빛으로 녹여내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그 공간에 흐르던 따뜻한 공기를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던 그 시기, 부장님의 가만히 들어주시던 그 순간순간들은 납작해지고 있던 내 존재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몇 달 뒤, 소송에 의해 합당한 벌을 받은 그 학부모는 나를 향해 휘두르던 악행을 거둬들였고,내게 사과의 편지도 보내오셨다. 나는 그제서야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시달리던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 학부모가 무람없이 던진 돌에 의해 마음에 상해를 입을 때마다, 보드랍게 감싸주는 듯한 부장님의 미소와 따스한 체온. 가만히 들어주던 순간, 그 순간이 그 모든 걸 극복하게 했고,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것이 가진 놀라운 힘을 부장님을 통해 피부로 체감했던 터라 이 그림책의 내용이 더욱 절절하게 내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다. 누군가의 말을 가만히 들어준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슬픔이나 어려움을 토로하면 대부분은 그림책 속 다른 동물들처럼 어서 말해봐,라고 재촉하거나 섣부른 해결방안을 내놓거나, 또는 그정도는 별거아니야 라고 운을 떼며 자신의 이야기로 돌리며 역으로 공감을 받아내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아마도 슬픈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방법을 몰라서인 경우가 많다.
가만히 들어준다는 것은 어쩌면 죽을 끓이는 행위와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만히 불앞에서서 죽이 끓어넘치거나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부드러운 스푼으로 가만가만 뒤적이고 적당한 온도와 묽기를 맞추기 위해 시선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듯,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그 사람 앞에 서서, 그 사람의 슬픔이 넘치거나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가만히 눈을 맞추고 들어주며 체온을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이 그림책을 읽다보니 최근 읽은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에서 보았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신의 힘든 속내를 쉽게 털어놓지 못해 친구가 없던 나오코가 마음의 문을 연 아즈사에게 하는 말.
“아즈사가 내 사정을 캐묻지 않고 옆에 있어줘서. 같이 달콤한 디저트를 먹어줘서. 그게 나에게 힘을 주는 유일한 시간이었어”
내게 부장님이라는 존재가 그림책 속의 토끼, 그리고 소설 속의 아즈사 같은 존재로 내게 힘을 주었듯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로 남고 싶다.
“누군가가 내 따스한 체온을 느낄 때까지 그렇게 말없이 옆에 있어주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