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봐주고 인정해주기
우리 집에는 시도때도 없이 붙기만 하면 전기를 일으키는 9살 첫째, 5살 둘째가 살고 있다. 톰과 제리를 현실로 재현하면 딱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달콤살벌한 장면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연출된다.
분유주고 기저귀갈고 하는 치열한 육아집중기를 통과하고 나니 주변에선 아이들이 좀 커서 편하겠다는 둥, 이제 둘이 놀아서 좋지 않냐는 둥의 말을 많이 듣곤 한다. 물론 아이들이 어릴 때에 비해 손이 덜 가고 엉덩이도 무거워 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주말 아침 두 아이가 나란히 일어나 거실로 뛰어나가 둘이서 도란도란 노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호사이긴 하다. 하지만가을동화에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남매인 준서와 은서의 다정한 모습은 채 5분도 못가고 어느새 톰과 제리로 바뀌어 날카로운 소리가 안방의 열린 문틈새로 흘러들어와 우리부부의 귓전을 후빈다.
“제발 그만 좀 싸워, 둘이 붙기만 하면 싸우니 정말”
참다못한 나의 호통소리가 다시 안방 문틈새로 흘러나가 거실에 있는 남매에게 당도하고 이내 둘째가 울부짖으며 우리에게 오빠의 만행을 고하러 온다. 대부분 장난감에 대한 문제다. 자기가 가지고 노는 걸 오빠가 뺏었다. 내가 만든 블럭을 오빠가 부셨다 등 장난감을 두고 일어나는 문제에 딸은 다양한 변주곡을 만들어내며 오빠를 혼내주기를 바란다.
그때마다 우리는 앙칼진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멈추고자 긴급버튼을 누른다. 그건 바로 첫째에게 양보나 사과를 종용하는 방법이다. “네가 오빠잖아. 첫째니까 의젓하게 굴어야지. 동생은 어리고 멋모르니 네가 한 번만 양보해” 임기응변식 대처로 어째저째 두 남매의 싸움을 두루뭉술 넘어가기 일쑤였다.
신생아시절부터 질투로 중무장한 오빠의 무수한 괴롭힘에 대처하는 방식을 차곡차곡 쌓아온 둘째는 일단 울음소리부터가 요란하다. 날카롭고 앙칼진 울음소리는 우리의 귀청을 뚫고 온 집안을 울리고도 남을 정도다.그에 비해 첫째는 크게 반격을 당한 경험이 없기에 억울하거나 서러우면 그저 구슬같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다. 그래서 두 남매의 싸움에서 늘 피해자 신분은 목소리가 큰 딸이다.
늘 우린 첫째에게 “첫째니까”라는 프레임을 씌워 두 남매의 전투를 겨우 잠재우지만 첫째도 겨우 9살인지라 참을성의 임계점을 넘는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동생이 잘못했는데 왜 내가 맨날 사과해. 내가 가지고 노는 거 얘가 맨날 빼앗아간단 말이야. ” 라며 분통을 터뜨리곤 한다. 그제서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음의 말로 어르곤 한다 .” 00이가 첫째로 태어나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첫째고 오빠니까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렴 “
안그러려해도 늘 그런식의 위로가 나온다. 첫째니까. 라는 프레임에 가둬두면 아이가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지독한 남매의 싸움을 조금은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엄마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어린 동생과의 싸움에서 늘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아들이 갑자기 안쓰러워졌다.
한 번은 놀이방이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른채 두 남매는 거실에서 태연하게 2차 전쟁터를 만드는 중이었다. 나는 대뜸 첫째를 불러 호통을 친다.
“놀이방 정리도 안하고 또 거실에서 어지르는 거야? 치우고 놀아야지 이게뭐야! ”
아들은 금새 얼굴이 일그러지며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자기는 치웠는데 동생이 다시 어질렀다는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항변하는 아들을 향해 또 한 번 첫째 오빠 프레임을 씌운다.
“네가 첫째잖아 동생이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되지. 동생은 어리니까 잘몰라 그래서 첫째인 네가 모범을 보여서 치워야 하는 거야“
유독 첫째라는 말에 강세를 붙여가며 동생은 그대로 두고 자신만을 힐난하는 엄마가 야속한 아들은 그 자리에서서 구슬같은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린다. 나는 일순 아들의 모습에서 과거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보여 마음이 뭉근해졌다.
삼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나는 줄곧 엄마의 첫째 프레임에 자주 갇히곤 했다. 집안이 어질러져 있거나, 동생들이 싸우면 늘 엄마는 내게 “첫째가 모범을 보여야지. 동생들이 엉망으로 만들면 첫째인 너라도 치웠어야지. 동생들이 싸우면 네 책임이야. 집안 내에서 벌어지는 삼남매의 모든 대소사를 첫째의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그 부정의스러움에 나는 할말을 잃곤 했었다.
첫째이기 전에 나는 나인데, 왜 나로 인정안해주고 자꾸 첫째로서의 책임만을 요구하는 거지? 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품고 살아왔고, 어른인 지금은 그 의무감에서 조금은 놓여났지만 여전히 첫째라서, 집안의 장녀라서 동생들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실체없는 의무감은 여전히 나를 보이지 않는 실로 옥죄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 생각을 하며 아들의 얼굴을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첫째나 둘째나 다 같은 엄마아빠의 아들딸인데 조금 더 일찍 태어났다고 해서 많은 책임감을 지우는 것은 어쩐지 아들에게도 부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속에 작게 다짐을 해본다. 앞으로 첫째라는 프레임으로 아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지 말아야지.
그날 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 준비를 하려는데 아들딸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집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화장실의 문틈 새로 두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조용하면 늘 불안한 법. 나는 아이들이 대형사고를 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심산으로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잠시 얼어붙고야 말았다. 세상에나 첫째가 둘째 양치를 시켜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00이 잘하고 있어 멋져 라는 따스한 말을 곁들여가며 말이다.
나는 그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기 아쉬워 재빨리 폰을 들어 사진으로 남겼고 그날의 감사일기에도 썼다.
“동생에게 다정하게 양치를 시켜주는 아들 00이 내 아들이라 감사하다”
나는 양치를 마치고 나오는 아들을 향해 엄지를 한껏 추켜세우며 “이렇게 다정하고 배려심넘치는 아들이 어디있을까? 00이는 이런 오빠 있어서 참 좋겠다. 우리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가슴을 가진 아이야”
라고 흠뻑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마치 칭찬샤워를 한 듯 개운한 표정을 한 아들은 그날 전에없이 동생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들었다. 물론 그 후로 두 남매는 절대 싸우지 않았답니다 라는 이솝우화에 나올법한 모범적인 결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싸움의 빈도수가 조금은 줄었다. 10분에 한 번꼴이던 싸움이 20분에 한 번이 되었달까.
비결은 바로 첫째니까 프레임을 걷어버리고, 동생을 배려하거나 위하는 따스한 순간을 맞닥뜨릴때마다 폭풍칭찬세례와 함께 늘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가슴을 가진 우리 아들. 너무 멋지고 훌륭해”
라벨링의 힘인 건지, 그 말을 들으면 아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어쩐지 너그러워진다.
아이들은 성장과정에서 어른들이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아이로 자라난다고 한다. 넌 잘할 수 있어 멋져. 따스한 아이야 이런 긍정의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필시 그런 아이로 자란다는 것. 피그말리온 효과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내가 어린 시절,첫째니까 라는 프레임에 갇혀 지금껏 첫째의무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물론 지금은 많이 옅어졌지만) 어린 시절 듣고 자란 말과 행동은 아이의 성장과정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두 남매에게도 이런 원리를 적용해,
첫째에겐 “세상 따스한 가슴을 가진 아들”
둘째에겐 “오빠의 마음을 이해하는 깊은 가슴을 가진 딸“
이라는 긍정적인 프레임을 씌워주다보면 언젠가는 둘의 싸움이 잦아드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꽃튀기는 전투 속 한 트럭의 미움이 서로의 가슴을 가득 물들이더라도 그 미움 속에서 간간이 피어오르는 남매애로 그 미움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를 바라며.
세상 따스한 아들, 깊은 가슴을 가진 딸아. 연휴내내 너희들의 능력을 발휘해주렴. 엄마아빠 귀보호좀 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