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가 속상했던 이유, 그림책 수업으로 알게 되다

금요일 6교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림책 수업을 꾸준히 이어오는 이유

by 이유미

어제자 급식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점심을 먹던 중 작은 소동이 하나 일어났다. 옆 반 아이가 실수로 급식판을 쏟았는데, 하필이면 우리반 회장 민서와 하준이에게로 나란히 음식물이 튀었던 것. 처음에 영문을 몰랐던 나는 우리 반 민서가 급식판을 쏟았거니 싶어 괜찮다며 휴지로 닦으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밝은 표정의 민서와는 달리 맞은 편에서 같이 피해를 본 하준이의 얼굴은 잔뜩 울상이 되었다. 같은 상황인데 참 반응이 다르다 싶어 안타까이 여기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급식판을 쏟은 옆반 아이의 담임 교사가 사태를 수습하고 돌아가며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선생님 반 여자아이 참 참하던데요. 불평 불만 한 마디 안하고 괜찮다고 웃어넘기는 걸 보니 참 기특해요"

아까 본 민서의 밝은 미소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어꺠가 으쓱해졌다. 그리고 교실로 돌아와 민서에게 그 말을 그대로 전하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칭찬에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피어오른 민서에게 시선을 거두고, 반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하준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준이의 소라색 티셔츠에 붉은 김치국물의 흔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속상하겠거니 싶어 하준이를 교탁 옆으로 불렀다. 나의 부름에 더 속상한 감정이 북받쳐올랐는 지 눈물까지 지어보였다. 나는 그런 상황이 어찌 올지 알았겠냐며 운이 나빴던 거라고 훌훌 털어버리라고 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자꾸 생각하면 속만 상하니 잊어버리자고. 그리고 아까 수업시간에 게임 후 채 못받아간 동전초콜렛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며 다음의 말로 위로를 마무리했다.


"달달한 것 먹고 잊어버리자. 속상하겠지만 세탁을 하면 금방 지워질거야."


여전히 굳은 표정의 아이. 충분한 위로가 되었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23명의 알림장 검사와 다음 수업이 묵직하게 내 가슴을 누르던 내겐 더 이상의 위안을 할 새가 없었다.


아이를 돌려보내며 나는 속으로 의문이 들었다.


"평소 씩씩하고 모든 일을 잘 털어내버리는 아이인데 좀체 속상함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아까 민서는 같은 상황에서 대수롭지 않게 잘 넘어갔는데.."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여남은 6교시, 그림책 수업을 이어갔다.

우리 반은 금요일 6교시마다 그림책 수업을 한다. 그림책 한 권을 가지고 함께 읽어보며 그림책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친구들 앞에서 털어놓고 서로 위안을 받는 그런 포근한 시간. 학교에서 시킨 적도 없고, 의무교육도 아니고, 누가 떠들썩하게 알아주는 수업도 아니지만 이 수업이 우리에게 주는 큰 힘을 알기에 나는 한 달쨰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오늘의 그림책은 바로 "가만히 들어주었어'. 라는 책이다. 공감과 위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그림책. 마침 아까의 일이 선명히 떠오르며 오늘에 딱 걸맞는 책이라는 생각에 무릎이 탁 쳐졌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기 전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언제인지 띵커벨(패드를 이용해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릴 수 있는 시스템)에 올리고 시작하자고 말했다.


얼마 전 치른 사회시험 점수가 낮아 엄마에게 혼이 난 순간, 동생이 더 잘못했는 데 억울하게 나만 혼난 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나 축구에서 성적이 안나온 순간 등 아이들이 자신의 일상을 보내며 위로받고 싶은 순간들이 마치 자수판 꽃처럼 빈 화면 이곳저곳을 수놓았다. 23명 아이들의 글을 찬찬히 훑어보며 미소짓던 와중 한 글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바로 아까 속상함에 눈물짓던 하준이의 글.


내가 위로 받고 싶은 순간

1. 부모님이 새로 사주신 옷에 음식물이 튀어서 속상했다.

2....

1번 항목에 쓰인 "새로 사주신 옷"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붙박였다. 그 단어 하나로 모든 사태가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아까 그렇게까지 속상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구나. 새로 산 옷..."

나는 하준이의 숨은 사연을 뜻밖에도 글로 접하곤 아까 오해했던 상황이 내심 미안해졌다. 속상한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주지 못한 것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같아도 정말 속상하겠다" 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예전 나도 비슷한 경험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고 아이들에게도 들려줬다.


"선생님도 3년 전 미술시간, 백화점에서 새로 산 하얀 블라우스에 한 남자아이가 물통을 떨어뜨리면서 초록색 물감이 와르르 튀어 속상했던 경험이 있어. 겉으론 괜찮다고 했지만 어찌나 속상하던지. 하준이 마음 깊이 이해해."


그 말을 하고 힐끗 하준이의 안색을 살피니 아까보단 조금 풀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의

그림책 선택이 참 탁월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림책 수업을 시작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책 수업이 아니었다면 영영 들을 수 없었던 하준이의 사연. 그 사연을 알지 못했더라면 내 마음 속 하준이는 예민한 아이로 내내 낙인찍혀 있을 수도 있었을테고.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림책을 읽어주었다. 처음 시작할 땐 무슨 그림책이야 라는 의문을 가진 아이들의 표정이 한 달새 많이 변했다. 4학년 아이들 만큼은 아니지만 6학년 아이들도 이 시간을 은근 손꼽아 기다리는 눈치다. 역동적인 놀이 수업에 버금갈 만큼 아이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수업은 아니지만, 은은한 매력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위안하며 오랜 여운을 남기는 그런 수업이라고나 할까. 전자가 짜릿한 청량음료라면 후자는 따스한 차같아서 마음을 따땃하게 데워주는 수업.


그림책의 마지막장을 덮음과 동시에 나는 아이들에게 미션을 주었다. 아까 친구들의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따스한 위안을 담은 댓글을 달아주자고. 아이들은 다시 눈을 반짝이며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위로받고 싶은 순간으로만 채워졌던 화면이 아이들의 따스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뭔가 모르게 화면에서 따스한 빛이 새어드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의 댓글을 다시 찬찬히 살펴본다. 아까 하준이의 글에 평소 친해서 그 사연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던 지용이의 댓글이 달렸다.


"하준아 정말 속상했겠다. 괜찮아"


그 한마디가 하준이의 얼굴을 조금은 펴주기를 바라며 댓글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날따라 유독 열기가 자욱하던 교실의 분위기. 이 외에도 아이들의 따스한 댓글들을 다 소개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황급히 수업을 마무리했다. 정신없이 수업을 정리하려는 와중 우리반 서율이가 내게 조용히 다가왔다.


"선생님 다음 시간에 꼭 민서의 댓글을 읽어주세요. 너무 따뜻해요."


그 말에 나는 화면을 끄려다 말고 부리나케 서율이의 글에 달린 민서의 댓글을 본다.

"우리 서율이는 내게 항상 믿음을 줘. 앞으로도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내게 말해. 다 들어줄게"


13살 여자아이의 어른스러운 위로에 나도 모르게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림책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보드라운 속내들. 그림책 수업을 지리멸렬하게 이어온 내 자신에게 감사한 순간이었다.


하준이도, 서율이도 하교길 뜨거운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기를 바라며..


체육수업으로 몸에 땀을 흥건히 내는 것도 좋아하는 아이들이지만, 그림책수업으로 마음에 땀을 흥건히 내는 것 또한 좋아하는 6학년 귀여운 내 아이들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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