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소재면에서만 보자면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내가 서울에 살면서 들은 말들을 다시 풀어놓는 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필 형태로는 이 책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필 형식에는 허구가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적힐 서울 속 말들은 모두 사실에 속한다. 하지만 그 말들이 지닌 의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나아가 닿게 하기 위해서는 소설이 지닌 허구성이 결국 필요했다. 이 책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은 한 사회나 시대를 다루는 소설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소설 형식을 선택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서울에서 떠도는 말들을 잡아 듣다 보면 그 말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보이거나 상상이 될 때가 많다. 그 이야기 속에는 순간적으로 탄생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들은 당연히 허구적이다.
진실을 주장하는 글은 그 진실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공격을 사방에서 받는다. 하지만 진실 그 자체도 형태가 모호하며 다차원적 입체이다. 수많은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그 진실이 지닌 중요한 면들은 다 깎아내어야 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나무토막 하나만 남게 된다.
그렇기에 소설만이 진실을 드러낸다. 어느 누구도 소설에 진실성이 눈금으로 달린 자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소설은 그리하여 표현적 자유를 얻게 된다. 물론 모든 자유가 그렇듯 여기에도 책임이 따른다. 진실을 주장하는 글은 그 진실성에 문제가 있음이 적발되어도 수정을 하면 된다. 그 행위는 양심적이고 용감한 행위로 인정받기도 한다. 수정조차 불가능한 완전한 비진실로 판명되면 그 글은 폐기되고 잊힌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소설은 확인이 아닌 비평을 받는다. 한 번 쓰인 소설은 부분 수정이 되거나 폐기되지 않는다. 인정을 받거나 비판을 받는다. 그 인정과 비판 모두 진실을 정확히 써내겠다는 글에 가하는 확인 작업보다 더 감정적이며 더 복잡하고 더 치명적이다.
이 책 역시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책이다. 이 책이 드러내려는 진실 역시 경계가 불분명하고, 모호하고, 다차원적 입체적이며 들쑥날쑥하다.
이를 드러낼 형식은 소설뿐이었다.
서울에 대한 녹취록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여러 해를 살면서 여러 나라를 다녀보고 난 후에 들었다. 나는 늘 서울에 살면서도 스스로가 이방인 같다고 느껴왔다. 그 이유를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이유를 깨닫자 그전에는 흩어져서 날아다니던 서울 속 말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말들 대부분이 싫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듣기 싫은 그 말들이 진실을 드러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그 말들의 이야기도 풀어봐야 했다.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다 해도 원인은 알아내도록 노력해야 했다.
이 책에는 그 노력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