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기 한두 해 전 녹취이다.
교사는 교과서로 교탁을 세게 내리쳤다. 펑, 하는 괴성이 교실을 흔들었다.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떠들던 소리가 소곤대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래. 그냥 자라 자. 공부해서 뭐하겠냐. 어차피 인생 다 정해져 있는거야. 공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신분 상승 할 것 같지? 아니야. 이 똥통 학교 다녀봐야 바닥이야. 여기서 10등 안에 들어봤자 서울시내 대학이나 갈까 말까라고. 그걸론 너네 인생 절대 안 바껴. 그래. 맞다. 해봐야 소용없는 공부 뭐하러 하냐. 그냥 디비 자라. 너넨 어차피 망한 인생이야. 그냥 자. 대신 떠들지는 말라고. 쳐 자는건 뭐라 안 하겠는데 수업 방해는 하지 말라고. 떠들지 말라고 방금 말했다. 야, 거기 너. 이 새끼야. 그래 너. 나와 이 새끼야!"
불려 나온 학생은 무차별적으로 맞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입은 걸었고 늘 학생들을 무시하는 말을 쏟아냈던 그였지만 그토록 심한 폭력을 휘두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기에 교실 안 학생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교사가 선택한 학생은 반항적이지도 않았다. 반항적인 학생은 따로 있었다. 교사가 때리면 맞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은 딱 그런 학생들은 따로 있었다. 그 교사는 그런 학생들은 피하면서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할, 그저 밝은 장난기를 타고난 온순한 학생을 목표물로 삼았다. 뺨을 때리고 발로 배를 차고 책 등을 휘둘러 등허리를 내려 찍고 알아듣기도 힘든 속도로 욕설을 쏟아냈다. 폭력은 교탁 부근에서 시작되어 교실 뒤 게시판까지 이어졌다. 패악질을 마친 교사는 말했다. "안 그래도 오늘 기분도 좆같은데 이 새끼가."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아마도 서울에서 교사 하기 가장 좋은 시절 중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학생에게 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해도 증거가 남지 않았다. 모욕적인 발언과 성희롱적 발언을 해도 녹취가 되지 않았다. 교권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요즘 세상과는 딴판이었다. 그 시절에는 교권이 지나치게 높았다. 교권은 최근에 와서야 추락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너무도 높은 위치 있었던 교권은 추락에 가속이 붙으면서 균형점이라고 여길 만한 지점을 순식간에 뚫고 내려가 끝 모를 나락으로 계속하여 떨어지는 중이다. 어쨌든, 그 시절에는 교권이 아직 하늘 높은 곳에 있었다.
저 사람은 어쩌다가 교사가 되었을까.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는 그저 교사였다. 가르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성적을 매기는 사람이고, 마음에 안 들면 매를 휘두르는 사람이고, 본인이 기분이 나쁘면 우리에게 화풀이를 하는 사람이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그 교사는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렸다. 공립 고등학교 교사로 온 것을 보면 그는 교육대학이나 교육학과를 나와서 임용고시를 봤을 것이고, 그 이유는 아마도 고등학교 교사 직업이 안정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교직생활 후에 받게 될 연금도 상당히 컸다. 그 당시에 교사를 시작해서 무사히 정년까지 다니다가, 혹은 연금 수령 조건을 채우고 그만둔 사람들은 현재 연금만 가지고도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 그 교사에게는 아마 그런 사실들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학생은 그저 일거리였다. 그것도 골치 아픈 일거리. 도무지 말도 들어먹지 않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자신에게 왜 반항하겠는지 모르겠는 수수께끼의 일거리였을 것이다. 힘든 직장 생활을 좋아하는 회사원은 없다. 그 교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본인도 방황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학생 하나 팬다고 교직에서 잘리는 일은 절대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들어가! 이 새끼야!"
교사에게 폭행을 당한 학생은 정신을 되찾지 못한 채 자리로 돌아왔다. 학생들은 그 학생을 불쌍하게 바라봤다. 물론 이런 일은 학생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교사들이 갑작스럽게 만만한 누구 하나를 선택해서 그날의 분풀이 대상으로 삼는 우발적 사건들에 학생들은 이미 익숙했다.
나는 교사에게 맞는 게 익숙한 학생은 아니었다. 교사와도, 다른 학생들과도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을 튼 몇몇 외에는 교류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수업 시간에 떠들 일이 없었다. 수업을 듣지도 않았다. 대부분이 별 가치가 없는 수업이었다. 나는 그 시간에 수업 내용보다 나은 다른 책을 읽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학생에게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교사들은 떠들지만 않으면 딱히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몇몇 교사의 수업은 들었다. 그러니 그들과도 부딪힐 일이 없었다.
그 교시가 끝나자 학생들은 얻어맞은 학생에게 몰려들었다.
"야, 괜찮냐? 미친새끼. 선생이면 다야?"
"저 인간 오늘 왜 저래? 미친놈이 지 기분 나쁘다고 이렇게 패?"
맞은 학생은 이제 좀 정신을 차렸는지 입을 뗀다. "야. 그래도 저번에 XX한테 맞은거보단 낫다."
"야, 비교할걸 비교해야지. XX 그건 원래 미친놈이고. 저새끼는 원래 좆밥이었잖아. 갑자기 왜 지랄이래?"
"내 말이. 정작 개긴애들은 따로 있는데 왜 너한테 지랄이냐."
그 얘기를 '개긴애들' 중 하나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야. 그래서 뭐. 저 새끼가 날 팼으면 좋겠다는 거야 뭐야?"
"아니, 그건 아니고..."
"씨발. 말조심해라."
그 욕을 들은 학생은 조용해졌다. 다른 학생들도 천천히 하나둘씩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개긴애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저번에 XX 걔한테 진짜 겁나게 맞았었는데. 싸이코새끼."
"야 너 저번에 내가 OO한테 맞은거에 비하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임마."
그들은 그렇게 어느 과목 교사한테 누가 더 치열하게, 비정상적으로, 오랫동안, 무차별적으로 맞았는지를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는 사람들처럼 앞다투어 말했다. 교사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한 경험이 마치 훈장이라도 되는 듯이. 학생들도 비정상이기는 그 교사와 매한가지였다. 신분사회 시절 노예들이 맞듯이 교사에게 두들겨 맞은 경험이 자랑스러웠을 리는 없다.
하루인가 이틀이 지나 그 교사 수업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교사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루인가 이틀 전에 노예를 팬 양반 같은 목소리로.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떠들지 말라고 했잖냐. 나도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줄 알아?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좋게좋게 가면 좋잖아. 내가 수업을 들으래, 공부를 하래? 듣기 싫으면 그냥 자도 된다잖아. 야, 이런 선생님이 어딨냐? 그러니까 떠들지만 좀 마. 알았어? 야, OOO(하루인가 이틀 전에 맞은 학생). 괜찮아?"
서울 녹취록을 고등학교 때 교실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내가 서울의 야만성을 제대로 목격한 시절이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교사도 야만적이었고, 학생도 야만적이었다. 그러니 학교 자체도 야만적이었고, 나도 그러한 야만성 속에서 별다른 눈치를 못 챈 채로 지냈다. 물론 그때에는 그 모습들을 야만적이라고 정의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다시 되돌아보니 이제야 분명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