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캠퍼스 가로수가 묵직한 공기를 이고 있다. 나무도 하고 싶은 말이 많겠다. 걸어가는 학생, 뛰어가는 학생, 차를 타고 가는 어른들. 그 속에서 쉼 없이 계절을 살아냈다. 수십 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잎이 지고 있다. 이슬에 젖은 채로 무던히도 예쁜 낙엽이 쌓이고 있다. 우람한 나무들은 여전히 수많은 잎을 보듬고 금방이라도 쏟을 듯하다.
'옆에 늘 있어서 우린 이게 기적인지도 모르고 산다. 누가 얼마만큼이나 저 잎을 보아주려나'하는 생각이 문득 지나갔다.
손톱보다 작은 싹이 트기를 오매불망하던 봄이 있었다. 어느 틈엔가 자라서 한 여름 뙤약볕에도 그렇게 넘실거리더니 지금 그 잎이 내린다. 어느 해였던가? 무리 지어 거닐던 가을날 한 무더기 낙엽을 보듬어 공중으로 날리기도 했다. 주말에는 차를 세우고 노란 은행잎 위를 걷고 줍고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보낸 가을날 기억이 많을수록 생각도 많은 걸까. 지나 간 날만큼 다가올 날도 보여서 말이 줄어드는 걸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닢이 트던 어느 봄이었다. '우와! 저기 좀 봐봐~ 정말 이쁘지?' 햇살이 눈부신 대 낮이었다. 감동이 저절로 나와 건넨 말이 톡 떨어지고 말았다. 공감이 올 줄 알았는데, 안경을 고쳐 쓰고 나의 눈을 바라보던 후배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게 그렇게 신기합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참 대단합니다.'
그 후 여름이 가고 낙엽이 날리는 길을 같이 걸어도 말 조심했다. '우와!'가 터져 나올 듯했고 정말 저기 좀 보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이 많았지만 꾹꾹 참았다. '나이 값도 못하는 또는 한가한' 정도의 비약을 하진 않겠으나 공감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다. 애써 동의를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다 알아야 보고 듣진 않는다. 그저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느끼는 게 좋다는데, 주위 자연도 바라보고 느끼고 공감을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삶은 무언가를 함께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쉼 없이 변하는 자연을 얼마만큼 느끼고 받아들이는지는 본인의 몫이다.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도 개인의 영역이다. 그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행복한 거다. 바쁜 일상을 탓하기 전에 옆에 선 나무 한 그루라도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알아봐 준다면 바라보는 자기 시선이 달라진 것이리라. 봄부터 쌓여 온 시간이 그렇게 켜켜이 내리고 있음은 누군가에겐 그게 기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