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지도 않은 딸

9.

by 사과꽃


푸르던 잔디가 절반 치나 말랐다. 찬 바람이 선뜻 불면서 약속이나 한 듯 빛이 변해간다. 뒷 벽이며 둘러싼 작은 둔턱 그리고 지금 밟고 있는 단에도 제법 터를 잡은 잔디가 지푸라기처럼 노래진다. 두 봉분 위 잔디 빛깔도 희끗한 머리 같다. 향을 피우고 술 한잔 올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머시기 언니입니다."


서있는 머시기를 한 번 바라보고 노부인이 옆에 앉은 노인을 쳐다본다.


"누구라고?"


말문을 튼 이는 이래놓고 다른 말을 이어간다. 덕담이 길다. 처음 올라온 산은 제법 골짜기가 깊고 좌우로 산들이 병풍처럼 낮게 둘러앉아 이곳을 쳐다보는 느낌이다. 여러 해 동안 벼르다가 따라왔는데 머시기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친구 같은 후배다. 그 부모를 뵈는데 딱히 저를 소개할 말이 없어 그리 말이 나왔다.


제가 언니라면 그럼 앞에 앉은 분들이 자기 부모가 되는데 미처 깨닫지 못한다. 누가 말해주는 사람도 없다. 그저 주위가 모두 벙긋이 웃는다. 긴 말을 풀어놓고는 누구도 보지 않는 비석 글자까지 하나하나 챙겨본다. 고운 눈매며 행동이 나이 먹은 태가 난다. 기웃기웃 들여다보던 잡신들이 뭐라고 속삭인다.


"누구라는 거야?"


"이렇게 귀한 술을 가져왔네"


"이런 날이 쉽지 않아요."


이 집 저 집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해가 뜨서 서쪽으로 이울기까지 온종일 있어도 먼당까지 사람이 오는 일은 드물다. 한 해 동안 두어 차례 오가는 날 말고는 한적한 동네다. 간혹 차들이 저 멀리 길가에 지나가도 콩알 만 한 크기로 스칠 뿐 산 초입까지는 올 일이 없다. 외길을 들어오는 차도 주로 벌을 치는 트럭이다. 오랜만에 두 처자가 올라왔는데 그중 한 사람은 영 낯설다.


자손들조차 마음 맞추어 찾기가 어려운데 앉은 이와 연도 없는 이가 이리 예를 갖추니 깊은 산에 앉아서야 안다. 찾아오는 이는 자손들이고 그것도 아직 다리에 힘이 남았을 때다. 손자까지 한 대를 내려가면 올 거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오늘처럼 낯선 이 가 오는 경우는 그야말로 동네방네 소문날 일이다. 노부부가 흐뭇하게 앉았고 술 한잔 얻어먹으려고 기웃대는 잡신들은 누군지 궁금해하는 얼굴 천지다. 조용하던 산허리가 오랜만에 소리 없이 먼지가 인다.



"그러니까 우리 머시기하고 친구란 말이네, 난 또 내가 안 낳은 딸인 줄 알았네! 아이고 놀래라"


"그 참 술이 맛있네" 노인이 답한다.


"그 보소! 자기 닮아서 아이들이 남한테 꽃이고 잎인 갚소!"


"우리한테는 꽃이고 잎이 아닌가"


"저들끼리 꽃이고 잎인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니 하는 말 아니요"




노마님이 모처럼 연신 입을 떼며 웃는다. 토신이 반짝반짝 오색 황토를 물들이고 늘어선 솔가지들이 살랑살랑 솔향기를 뿜는다. 벌 나비를 쫓던 자신(子神)도 나풀나풀 뛰어다닌다. 노부부가 입산하고 간간이 산허리가 시끌벅적하다. 타박하니 부채모양으로 언덕을 두른 집도 이 집뿐이다. 오기 전에는 출입로를 기다랗게 내더니 어인 일인지 허물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 뿌리까지 정성껏 캐서 옮겨 심었던 배롱나무도 이 집이 처음이다. 산 중턱에서 가장 화사한 배롱나무는 이사 온 뒤로 나날이 자랐다. 그 나무 지켜내느라 이웃들의 노고도 컸다. 도란도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가는 이들이 정을 뿌려놓고 간다. 누군가가 올 때까지 그 정이 온 산을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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