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종장_남겨진 질문들

프로젝트 : 부메랑 _ 수백 년 만에 다시 필요하게 된 스스로의 자각

by rio

AI 기술이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통합되면서, 현대 사회는 전례 없는 속도 중심의 구조로 재편되었다. 데이터의 처리 속도, 의사결정의 반응 시간, 서비스 제공의 효율성 등은 이제 인간의 생활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 구조 안에서 기술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한 환경으로 인식되며, 개인은 그 속도에 기대어 일상을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기술에의 의존이 심화될수록,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감각적 중심성과 판단 능력은 점차 희석되는 양상을 보인다. 기능적으로는 더욱 편리해졌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중심을 상실한 상태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단순히 기술적 변화로만 요약되지 않는다. 결정의 주체가 인간에서 시스템으로 이관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판단의 수용 방식은 과거와 전혀 다른 형태를 띤다. 사용자들은 이제 결과를 분석하거나 질문하기보다, 이미 산출된 결론을 ‘정답’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 과정은 사유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며, 판단의 주체성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정답을 찾는 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유지하고 검토하는 능력이다. 기술이 주도하는 체계가 강화될수록 인간은 질문을 통해 사고의 틀을 확장해야만 중심성을 회복할 수 있다.


근대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무지와 전통적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시대적 전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른 차원의 계몽이 요구된다. 완전한 해답이나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질문을 통해 불완전한 현실을 견디는 방식이 새로운 계몽의 태도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 계몽은 종결점을 지향하지 않으며, 일관된 사유의 흐름 속에서 비판적 질문을 중단 없이 이어가는 과정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 지식의 축적보다 중요한 것은 판단력의 유지이며, 속도보다는 방향 설정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기술로부터 초래되는 위험의 상황에서 더욱 중요성을 갖는다. 기술의 자동화가 강화되고 AI가 인간의 일상과 정책, 윤리적 판단까지 대체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할 때, 인간 존재의 본질적 요소들은 기능적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위험’은 단순한 기술적 실패나 보안적 취약성이 아니라, 인간성의 구조적 침식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술은 효율적 결과를 제시할 수 있지만, 후회, 공감, 신뢰와 같은 요소들은 논리적 연산이나 자동화된 의사결정 체계 내에 포함될 수 없는 성질을 갖는다. 다시 말해, 기술이 인간 삶의 운영을 장악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다움의 회복 가능성 또한 동시에 형성된다. 위기의 순간은 역설적으로 인간 고유의 능력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적 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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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돌아보면, 르네상스는 단절의 시기가 아닌 복원의 시기였다. 고대의 가치와 인간 중심의 사고가 중세의 종교적, 봉건적 질서 속에서 억압받던 시대에, 다시 인간의 감각, 이성, 창조성이 사회적 의제로 부활했던 시기였다. 지금의 기술 시대도 유사한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인간의 자율성과 비판 능력이 자동화와 효율성에 밀려 주변화되는 이 시점은, 새로운 인간 중심 질서의 회복이 가능해지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과거의 르네상스가 고전의 재발견을 통해 인간 존재를 재구성했다면, 현재는 기술 이후의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통해 새로운 중심을 설정해야 하는 시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확한 해답이 아니라 적절한 질문의 형식이다. 기술 이후의 인간은 어떤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사회를 운영할 것인가, 기술 시스템이 판단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떤 형태로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결과 중심의 판단 체계 속에서 인간 고유의 오류 가능성과 해석적 다양성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실천적 가치를 갖는 동시에, 기술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재정립하는 출발점이 된다.


계몽은 한 시대의 성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가 스스로에게 묻고 또다시 되묻는 구조적 여정이다. 따라서 기술 중심 사회에서도 계몽은 유효하며, 오히려 더욱 필요하다. 질문을 지속할 수 있는 지적 태도와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기술이 인간을 압도하지 않도록 만드는 가장 강력한 전략이다. 인간의 중심성이 다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은, 위기의 국면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적 전환은 결과가 아닌 질문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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