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현실적인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분가의 대가 1'에서 연결
꽃하은 9시 등원, 2시 하원. 내가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은 5시간.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진짜 자신을 찾으려 퇴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퇴사하기 위해 오전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내 인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아이러니했다. 생각할 때마다 코 끝이 뜨거워졌다.
이왕 커리어를 잇지 못할 거라면 다음 직업을 고르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정리했다.
․ 독박 육아가 가능해야 한다.
․ 건강하고 싶다.
․ 시간당 페이가 적정선은 되어야 한다.
․ 추후 온전한 사업으로 키우고 싶다.
․ 지역 이동이 자유로워야 한다.
현실에 맞춰 근무 조건을 정리하고 나니 필라테스 강사가 떠올랐다. 몸이 아파 1:1 개인 레슨을 오래 받았지만 강사라는 직업을 고려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해부학을 기본으로 재활 지식, 체형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눈, 동작을 쉽게 전달하는 표현력, 그리고 스스로 동작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능력, 무엇보다 믿고 운동을 맡길 수 있는 몸이 있어야 했다.
평소에 숨쉬기 운동도 벅찬 사람이라
하하하하하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일단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해보자.
대차게 달려가서 필라테스 강사 프로그램을 결재했다.
위의 ‘잘하는 것’은 내가 당시 필라테스를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추진을 잘한다. 일단 시작하고 달리는 것을 아주 잘한다. 안 되는 것을 되게끔 하는 것도 잘한다.
목표를 세우려면 역시 소질과 재능이 필요한 것 같아.
그가 말했다.
목표 같은 건 현실적인 이유로도 충분히 정할 수 있어
그녀가 말했다.
Jude Friday, 진눈깨비 소년
동의한다. 어느덧 서른 중반이었고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가지고 있는 제너럴한 재능보다 현실이 더 강력했다. 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잘하게 되면 좋아하게 되고, 좋아서 하다 보면 그게 재능이 되는 거겠지, 직무와 재능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오히려 결정은 빠르고 쉬웠다.
다음 해 분가에 성공했다. 오전엔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고 오후엔 육아에 집중한다. 회사와 가까워진 남편과 저녁을 먹고 다 같이 부루마블도 한다. 아이가 잠들면 다음 레슨을 준비하고 외주로 들어온 일을 한다. 4년이 지나도 내일 먹을 메뉴 검색이 어색하다.
현실적 이유와 재능 중 어떤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했더라도 그게 선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은 아닌 것 같다.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했다. 나이 많은 신입으로 넓고 깊게 쌓느라 힘들었지만 레슨을 받으려면 나름 대기가 꽤 긴 강사가 되었다. 이 직업이 매일 더 좋아지고 있다. 그리고 내 인생에 직업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