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나는 달리기를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싫어했다. 운동회에서 5명이 뛰면 언제나 5등이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뛴다는 게 모양 빠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승전까지 죽어라고 달리고 순위를 매기는 경기는 재미없었다.
사춘기 때는 몸의 변화 때문에 달리는 게 싫었다. 남자아이들이 내 가슴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달리면 티셔츠가 달라붙고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 가슴이 도드라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한쪽 손으로 티셔츠의 밑을 당겨 끌고 뛰었다. 뛰다가 그게 더 이상한 걸 알았다. 난감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무조건 달렸다. 체육시간에 100미터 달리기를 했고, 체육대회도 있었다. 체력장도 해야 했다. 우리 집은 버스 정류장에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첫차를 타려면 6시 10분에 나와야 했다. 6시 30분 차를 놓치면 다음 차는 7시다. 버스를 타고 40분 걸리는 학교에 다녔던 나는 두 번째 차를 타면 지각이었다. 무조건 첫차를 탔다. 6시 10분에 나와야 여유 있게 걸어가는데 나는 꼭 6시 20분이 넘어 출발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엉덩이 부분에서 엉켰는지 스타킹이 불편했고, 교복치마는 돌아가지 않게 손으로 만지면서 뛰었다. 그때는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열심히 달렸던 때였다.
한 줄에 나란히 서서 달린다. 준비 땅 소리를 들으면 앞으로 튀어나간다. 단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점수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린다. 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운동장에 서 있었다. 나와 같은 줄에 선 친구들은 땅 소리에 맞춰 놀란 산양처럼 뛰어 나가는데 나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총소리가 너무 커서 뛰기도 전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루키가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외면했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했던 나는 그저 하루키를 소설 속에서만 만나고 싶었다. 소설가를 소설이 아닌 곳에서 만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루키에 대한 환상이 커갈수록 하루키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을 스스로 자제시켰다. 오랜만에 만난 마음에 드는 소설가인데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달리기를 좋아하든 말든 소설을 쓰기 위해 마라톤을 하든 말든 외면했다. 뭘 하든 소설만 좋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딘가에서 나이를 먹는 사이 나도 중년의 여자가 됐다. 조금 말랑해졌다. 달릴 때마다 누군가를 의식하던 열여섯 살이 아니라 매일 꾸준히 달리며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하루키의 달리기 에세이를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승리보다 소중한 것>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잡지사의 제안으로 시드니에서 23일 동안 머물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하루키 방식으로 풀어낸 시드니올림픽 관전기다. 도서관 책장 하루키코너에서 아직 읽지 않은 하루키의 책이 있어서 집어왔다. 내용도 모르면서 읽었다.
그런데 이 책 재밌다.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너무 재미있다. 끝나는 게 아쉬울 만큼. 책을 읽다 자꾸 문장을 옮겨 적었다.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루키의 찐 팬으로서 잠시 에세이를 읽지 않았던 지난날의 나를 원망했다.
하루키는 시드니 올림픽 기간 동안 경기장 근처 호텔에 머물며 올림픽을 관전했다. 아침에는 조깅을 한다. 마라톤선수들이 달릴 코스를 달려본다. 철인 3종경기를 관람한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하루키는 매일 조깅을 했다. 경기를 관람하고 호텔에 돌아와 원고지 30매 이상씩 매일 글을 썼다.
하루키의 말에 의하면 단기간에 이토록 많은 원고를 쓴 것은 작가로 인한 20여 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매일같이 기관총을 쓰듯 키보드를 두들겼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루키가 무거운 기관총을 들고 람보처럼 총을 쏘아대는 모습은 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키보드를 두들기는 게 훨씬 어울린다.
하루키는 시드니 올림픽을 거대 자본과 거대 미디어 시스템이 만들어낸 공동환상이라고 말한다.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장치는 친절한 해설과 녹화 중계가 곁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승리보다 소중한 것>은 그러나 단순한 시드니올림픽 관전기가 아니다.
하루키가 누군가. 틀에 박힌 걸 싫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일 줄 아는 자유인이다. 그는 뻔한 올림픽 이야기를 쓰는 대신 호주의 문화와 매일신문을 보며 상어에게 공격받은 사람, 보석상을 턴 도둑 등 가십거리를 툭툭 던져준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하는 마음으로 동물원에 가거나 해양박물관에 들어간다. 트라우마를 겪은 코알라나 수족관에서 만난 코브라보다 50배나 독이 많은 뱀을 말한다.
호주의 역사와 사람들을 소개한다. 친절하고 세세하게 하루키식으로. 오래전 영국의 죄수들을 이끌고 정착한 대륙. 풍족한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 시절의 사람들. 그리고 원주민과의 갈등등이 툭툭 튀어나온다. 냉소적이면서 따뜻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하루키만의 호주 이야기.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올림픽을 보면 우리는 중계해 주는 대로 보게 된다. 방송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걸 틀어준다. 우승한 선수들에게 조명이 집중된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야기에 열광한다. 조국의 메달수를 매일 확인하며 부진한 국가대표를 질타한다.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서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쯧쯧 하는 마음으로 리모컨을 돌린다. 선수들이 흘리는 땀을 당연시하고 굳은 얼굴에 인상을 찌푸린다. 선수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그저 운동선수로만 생각한다.
하루키가 말한다. 그는 직접 선수들의 경기를 본다. 마라톤선수들이 달릴 코스를 뛰며 생각한다. 달리기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운동인지 아는 하루키는 그래서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선수들을 기억하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올림픽을 예찬하지 않아서 좋았다. 우승한 선수보다 기권한 선수이야기를 써서 좋았다. 무엇보다 그 이야기가 이 책의 마지막에 쓰여 있고 그것이야말로 하루키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라 좋았다.
하루키는 역시 하루키였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을 최근의 싸움에서 패배한 두 명의 선수를 조명함으로써 맺으려 한다. 그들의 실의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 책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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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다. 이들은 이를 악물고 고된 훈련을 소화해 왔다. 이들은 각자의 삶의 방식과 꿈과 야망, 그리고 각자의 약점을 지녔다. 우리 모두처럼.
우리는 모두, 거의 모두 자신의 약점을 껴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 약점을 없앨 수도, 지울 수도 없다. 약점은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숨겨 둘 수는 있지만, 긴 안목에서 보면 그런 행위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은 약점을 인정하고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약점에 발목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로 삼아 스스로를 보다 높은 곳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깊이를 얻을 수 있다. 소설가든 육상 선수든 평범한 직장인이든 원칙은 같다.
물론 나는 승리를 사랑한다. 승리를 평가한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 이상으로 '깊이'를 사랑하고 평가한다. 때로 인간은 승리하고, 때로 패배를 맛본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남자 마라톤의 메달후보였던 이누부시는 결승전에 들어오지 못했다. 탈수상태로 들것에 실려갔다. 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었지만 실패한 여자 마라토너 아리모리 유코는 여자 마라톤 TV중계의 해설을 맡았다. 다카하시 나오코가 여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더라도 순수하게 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설을 했던 아리모리 유코.
사람들은 올림픽 대표 선수라면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은 4년 동안 메달만을 생각하며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그렇지만 메달은 연습과 실력 외에 또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금메달 우승후보자가 탈락하고 무명의 선수가 치고 나온다.
인생역전, 역전의 드라마. 사람들이 열광한다. 스포츠는 확실히 사람을 들뜨게 하는 매력이 있다.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스포츠의 세상을 확대해 보면 인생이 나온다.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고통을 참고 견디며 묵묵히 앞으로 나가는 선수들에게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를 생각했다
하루키의 또 다른 달리기 예찬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이어 달리기로 나를 유혹하는 책이다. 힘껏 달리는 건 못해도 설렁설렁 아니 살짝살짝 뛰어볼까? 걷다 뛰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겨울이니까 봄이 오면. 봄에는 황사가 심한데. 꽃가루 알레르기는 어떡하지? 피부과선생님이 땀 많이 흘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
윽.. 이렇게 쓰다 보니 나 진짜 구질구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