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시작부터 강렬했고, 한번 읽어 내려간 이상 절대 책을 덮어버릴 수 업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지인이 이 책을 소개하며 여자 시드니 셀던이라 표현을 썼는데 과연 이 말이 맞았다. 여고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살았던 단발머리. 책을 읽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상상도 못 할 전개에 입을 틀어막는 이야기.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로맨스소설이자 미스터리, 살인이며 법정 스릴러물이자 소녀의 성장이야기였고, 자연에 대한 예찬 소설이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작가 델리아 오언
어떻게 이런 글을 썼지?
소설을 읽다가 표지로 돌아가 작가의 사진을 봤다. 일흔 살의 백발의 여성(할머니라는 표현은 쓰지 못하겠다. 청잠바를 입고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나이를 짐작할 만한 어떤 것도 없으니까), 여성생태학자.
배경지식을 알고 소설을 읽는데도 내내 의구심이 들었다. 이 문장을 정말 이 사람이 썼다고?
애인을 향한 갈망, 뼈에 스미는 고독, 채워지지 않는 청춘의 격정과 배신당한 자의 복수심. 잊고 살았던 젊은 시절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과 심리묘사를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해 냈을까? 고정관념이었다. 나이가 들면 글도 늙어간다는 것을 코웃음 치게 만드는 그녀의 현란한 글솜씨에 혀를 내두르며 책에 빠져 들었다.
1952년 8월. 카야의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물리적 폭력을 견디지 못한 네 명의 언니, 오빠가 집을 떠난다. 7살 카야는 술주정뱅이에 폭력적인 아버지와 둘이 습지의 작은 오두막집에 살고 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삶 속에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서는 카야. 사라진 아버지. 카야는 홍합을 캐어 팔고, 생선을 잡으며 야생의 습지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고. 카야를 도와주는 사람들. 사람을 믿지 못하지만 결국 사람에게 의지해야 하는 카야.
점핑과 메이블, 데이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며 카야는 고독 속에서도 사회와 작은 끈으로 연결된 채 커간다.
카야에게 습지는 집이었고, 해변가의 갈매기는 이야기를 나누는 형제였다. 테이트에게 글을 배우며 처음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만 테이트는 현실을 택하고, 카야는 다시 버림받았다는 고통에 시달린다. 이때 마을에서 제일 멋있고 운동을 잘하는 체이스가 카야에게 접근한다.
체이스는 습지걸이 소문과는 달리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카야의 습지 오두막을 자신의 안신처로 삼는다. 카야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체이스와 수컷의 뻔한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속은 카야. 그리고 체이스의 죽음. 사람들은 범인으로 카야를 지목한다. 이제 카야는 사람들의 편견과 맞서 싸워야 한다. 지루한 법정 싸움이 이어지고 밝혀지는 진실.
작가 델리아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외로움에 대한 책이라고 말했다. 내가 읽은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카야의 성장소설이자 카랑님의 표현처럼 여자 시드니 셀던 식의 로맨스 소설이다. 또한 체이스의 살해 범인을 찾는 법정소설이기도 하다. 카야의 아픔과 성장과정 그리고 체이스의 살해범을 찾는 보안관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읽다 보면 뻔한 표현이지만 정말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카야는 어떻게 이 사건을 해결해 나갈까? 카야는 정말 범인일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 카야는 매력적인 여자다. 사회가 흔히 요구하는 여성성이 카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카야의 늘씬한 다리와 긴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에 대한 묘사는 여주인공에 대한 전형적인 외형묘사에 해당한다. 남자들은 그런 카야의 외형적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다는 표현 역시 진부하다.
나는 카야가 당당해서 좋았다. 카야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깊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누구보다 빠르게 결단을 내린다. 마치 사람의 발자국소리에 재빨리 몸을 숨기는 도마뱀처럼. 글을 읽고 책에서 세상을 배우지만 야생동물의 세계에서 파악한 동물의 생존본능을 적용시킬 줄 아는 카야는 생각하고 행동한다. 테이트와 체이스는 카야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비슷한 캐릭터로 <말괄량이 삐삐>가 떠올랐는데, 삐삐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사는 아이였던 반면 카야는 야생습지에서 철저하게 혼자라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둘 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설 줄 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의 편견에 맞서 싸울 줄 안다. 그리고 영리하다. 진주목걸이를 걸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보다 허름한 옷을 입고도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한 카야가 더 좋다. 어렸을 때 삐삐를 처음 봤을 때 설레었던 것처럼 카야 역시 내 마음을 뛰게 만들었다. 입체적인 인물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나이가 들면서 책을 읽는 방법이 달라진다. 10대나 20대일 때는 소설 속의 주인공에 나를 대입시켜서 읽었다. 나는 언제나 주인공이었다. 심하게 몰입해서 읽다 보면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30대 때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주로 마음을 달래주는 책을 읽었다. 소설보다 더 치열한 육아세계를 살고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자꾸 기도를 했다.
40대인 지금은 한걸음 떨어져서 글을 읽는다. 주인공의 입장이 아니라 주변인의 눈으로 글을 읽는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작고 사소한데 마음을 흔드는 것들이 보인다.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을 때는 자식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카야의 엄마와 어린 시절의 젊은 엄마가 생각났다. 그리고 혼자 남은 카야가 어려움을 겪으며 고난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순간들에서 자꾸 눈물이 났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카야를 응원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카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은 없다. 생태학자인 작가는 카야의 삶에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자연과 함께 살다 자연 속으로 돌아간 카야. 외롭고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 그리고 남은 사람은 그저 묵묵히 살아간다. 파도가 치면 몸을 숨기는 소라게처럼 자신만의 방법으로 어떻게든 살아간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삶과 죽음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소설의 마지막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