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누 Dec 25. 2023

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 장편소설

체코소설의 슬픈 왕


제목에 끌려 산 책이 이토록 대단한 책일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생각을 하고 구입했을 텐데.. 선무당이 사람을 잡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제목이 좋고, 표지가 예쁘고  체코 맥주가 좋아서 선택했을 뿐인데, 읽는 내내 빠져 들어가  나오는데 한참이 걸렸다


130쪽 분량은 제법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쉬운 미끼였다. 빨리 읽고  얼른 포스팅을 해야지. 생각했다가 호되게 당했다. 솔직히 난 이 책이 어렵고 힘들었다. 처음 읽고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책을 덮어버렸다.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슬그머니 책이 말했다. "나를 읽어 줘."


그래서 두 번째 읽었다. 같은 문장을 두세 번 소리 내어 읽고, 노트에 또박또박 적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그토록 모호하고 어렵던 문장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번 마음을 준 책은 작정한 듯 무장해제가 됐고, 나는 신이 나서 읽어 내려갔다. 한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책이지만 절대 쉽게 잡히지 않는 책이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삼십 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 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 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나의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 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 왔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P.10


너무 시끄러운 고독


8장의 이야기 중 5장이 이와 같거나 조금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시작한다. 삽오 년째 책을 압축하고 있다고 말하며 책이 주는 즐거움이 나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말을 한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책을 인쇄하면서 나는 장갑을 끼지 않고 책을 분류하던 중 훌륭한 작품들을 건져내어 읽기 시작한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서 내가 일하는 지하실은 언제나 압축을 기다리는 폐지들로 가득 차 있다. 상관은 나를 독촉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은밀하게 책을 찾는 교수를 만나고 학자들에게 책을 전달한다.


정복자들이 그토록 없애고자 했던 책들은 나에게 옴으로써 새로 태어난다. 나는 책을 읽고 내 것으로 만든 것으로 모자라 책들을 소유하고자 했다. 집으로 가져간 책만 2톤이 된다. 나의 집은 누워있는 공간만 비어있을 뿐. 천장에서부터 가득 차 있는 책들 속에서 나는 행복하다.


나와 같이 책 속에 세상을 이루고 살고 있는 쥐들을 죽여가며 혹은 공존해 가며 책에서 읽은 것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나는 삼십 오 년째 지하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남자다. 친구도 가족도 없다.

 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나는 살아남았고 예수와 노자가 종종 찾아온다

유명 화가들의 모조품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면 그것들을 소중한 책의 꾸러미를 포장하는 데 쓰인다. 나의 지하실에는 세상의 모든 석학들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나는 지극히 고독하면서 거센 물살 속의 자갈돌처럼 시끄럽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내가 책을 읽으며 책을 내 것으로 만들 듯 쥐들도 책들을 파 먹으며 자신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쥐를 죽이기도 하지만 쥐와 공존을 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는...


내가 지하에서 삼십 오 년째 초록과 빨간 버튼을 눌러서 왕복운동을 할 동안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시내 공장을 보러 간 나는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멈출 줄 모르는 컨벤션. 사람은 책을 찢고 켄베이션에 올려놓는 로봇 같았다. 그런 행위에 사고나 개인적 판단 따위는 필요 없다. 다만 반복되는 동작과 효율적인 작업운영이 존재할 뿐.




나는 종이의 감촉을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장갑을 끼지 않고 작업을 했다.  공장에서 장갑을 낀 직원들은 똑같은 유니폼을 갖춰 입었고, 밀려드는 책들을 들춰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들춰볼 수가 없었다. 기계는 한순간도 개인적인 시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거대한 압축기는 마치 저인망고기잡이배에 있는 물고기 선별작업을 떠올리게 해다. 혹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닭고기공장의 닭모가지를 비트는 사람들이나. 잡히자마자 통조림이 되는 물고기나 사고의 집합체로서의 책이 아니라 그저 처리해야 할 폐지에 불과한 책이나  손에 잡히는 순간 목이 뽑혀 버리는 닭모가지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서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하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P.12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후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P.26




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통이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가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P.75



 충격과 공포를 도무지 이겨낼 수 없었던 나는 하나의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1960년대 공산주의 체제하의 체코 프라하가 배경인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보후밀 흐라발(1914~1990)의 자전적인 영감에서 탄생한 소설이다. 흐라발은 42년 동안 공산주의 체제의 감시하에서 체코에서 글을 썼다. 법학을 공부했지만, 1939년 나치에 의해 대학이 폐쇄된 후에 공증인, 서기, 창고업자, 전보 배달부, 전신 기사, 제강소 노동자, 철도원, 장난감가게 점원, 보험사 직원, 약품상 대리인, 단역 연극배우. 폐지 꾸리는 인부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다.

.

그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았던 작가라기보다 살아있기에 글을 썼던 사람이며, 그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매혹적인 실존의 기록이다. P.135~P.136. 옮긴이의 말 中


주인공 현타는 책을 고독의 피난처로 삼은 사람이다.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사회로 변해가는 체제 안에서 현타는 지하실에서 책들을 압축하고, 책들을 읽으며 생각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았다. 현타는 정부가 없애려고 했던 책을 구해냄으로써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효율적이고 균일화된 세계를 상징하는 젊은 세대에 직면하고, 자신이 힘들게 구축한 세계의 종말을 목격한다


 압축기 속에서 책이 압축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사랑하던 어머니와 외삼촌도 혹은 첫사랑이었던 집시여인도 모두 사라진다. 그런 모든 현상을 현타는 지켜본다.  현타의 생각과 삶은  반복되는 문장들로 인해 강조되고 독자에게는 마법의 주문처럼 다가온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두고 호라발 자신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그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고백했다. 세상에 온 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쓰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체코의 맥주가 생각났다. 깊은 사고를 위해서 매일 5리터의 맥주를 마신다는 주인공의 고뇌가 아주 조금은 공감이 됐다. 나도 체코 맥주를 마시면서 글 쓰는 걸 좋아한다.

이전 03화 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