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누 Apr 27. 2024

무거운 사람, 단단한 사람

만나면 묵직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작은 얼굴에 선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데, 손가락 마디가 굵고 힘줄이 솟아 있는 손으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말이 많지 않은데, 하는 말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자꾸 몸을 앞으로 기울이게 된다. 푸념도 하소연도 비난도 하지 않으면서, 제 삶을 들려주는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가 살아온 세월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많은 우여곡절과 역경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지 말해 달라고 청하자,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 앞에서 자꾸 나는 뭘 하고 살았나. 싶었다.


그는 세 남매 중 장남이었다. 밑으로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둘 있었다. 종갓집 장손으로 집안 어른들의 기대와 이쁨을 받고 자랐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서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온갖 대회를 섭렵했다. 글짓기, 웅변, 수학경시대회, 육상대회까지 그가 나가기만 하면 1등이었고, 그는 월요일 전체조회 때마다 교장선생님에게 상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웃으면 눈이 아래로 내려가는 푸근한 인상의 아줌마였다. 억센 바닷가동네에 시집와서 물질하는 해녀들 틈에 살면서도 모진 소리 한번 들은 적이 없었다. 산골에서 나고 자라 바닷바람에 얼굴이 뒤집히고, 물고기보다 돼지고기를 더 좋아했지만, 남편의 고향이 곧 내 집이다 생각하며 살뜰하게 세 남매를 키웠다.


그의 집은 대대로 내려오는 재력가 집안이었다. 한때 그 집안의 땅을 밟지 않으면 동네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아니어도 신식으로 지은 이층 벽돌집에 거실에 나무계단이 있었다. 동생들은 양장점에서 맞춘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를 쳤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집 앞을 지나가다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고단한 걸음을 멈추고 잠시 넋이 나간 것처럼 서 있곤 했다. 봄날에 해바라기 하는 노인들도 피아노소리를 감상하는 열혈관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손끝이 야무졌다. 철마다 김치를 하고, 된장과 고추장을 담가 마당에 나란히 서 있는 항아리를 채웠다. 벽을 타고 오르는 붉은 장미에 줄을 묶어 고정시키고, 데이지꽃을 잔뜩 심어 화단을 만들었다. 붉은 진달래와 노란 국화가 철에 맞춰 피어나는 것도 그녀의 솜씨였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울며 매달리는 어머니를 끌어내고 대문을 잠갔을 때, 그는 방에서 울고 있었다. 평소에도 술을 마시면 아무에게나 손찌검을 하던 남자였다. 다른 때와 다른 건 이번에는 어머니의 가방을 던지고,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어머니의 등을 내려치고,  뺨을 후려치고, 세상의 모든 욕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십 년을 공들인 집에서 쫓겨났다. 10살, 8살, 6살 세 남매의 이름을 부르며 밤새 대문을 두들기다 목이 쉰 그녀는 새벽에 가방을 끌며 작은 어촌 마을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울다 지쳐 잠이 들면서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다. 자고 나면 어머니가 부엌에서 끓이는 된장국냄새가 날 것이라고 믿었다. 술에서 깬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대문을 열면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우는 동생들을 다독였다.


다음 날 그의 어머니가 돌아선 대문을 열고 들어온 건 고모보다 더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세 남매를 불렀고,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는 혀를 깨물어 나오는 피를 삼켰다. 그는 아버지집에서 스무 살이 되자마자 나왔다. 종갓집장손이라며 집안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추켜 세우던 집안의 어른들은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했고, 고모보다 더 젊고, 동네 어느 여자보다 진하게 화장하는 그 여자와 살며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재산을 하나둘씩 처분하기 시작했다.


한때 그 집안의 땅을 밟지 않으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땅부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집을 팔아 손에 넣은 돈을 들고 여자가 사라진 날, 그의 아버지는 대문을 나서다 쓰러졌다. 어머니가 밤새 두들겼던 대문의 손잡이를 잡고 누워 있는 남자를 동네 사람이 발견하고 병원에 옮겼다.



소식을 들은 가 아버지를 찾아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그 옛날 아무에게나 손찌검을 하던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눈을 찌르며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고 원망과 푸념을 욕설과 함께 뱉어내는 추한 노인이었다.


 그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들어간 그는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고, 방을 얻을 돈이 생기자마자 두 동생을 불렀다. 일하고, 월급을 받으면 쪼개고 쪼개면서 살았다. 동생들의 학비를 대고, 옷과 화장품을 사주며, 그와 동생들이 견디는 동안 그의 아버지가 뭘 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매일 밤 김치에 소주를 마시며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삼키며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오랫동안 누워 있었고,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병원비를 내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나서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그는 슬픔보다 안도감을 느꼈고, 그런 자신이 섬뜩했다가 고개를 흔들어 무서운 생각을 떨쳐 버렸다.


두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는 지금 그는 가끔 그때가 생각난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아니라 남자라고 생각하면 그런 일들이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는 말을 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사촌동생 앞에서 나는 여자에게 재산을 뺏긴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어떻게 하면 좋냐고 조언을 구했다.


 은행 지점장인 그는 법적인 문제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주는데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다 알고 있었던 나는 그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도 이렇게 받아들이기 힘든데, 고작 열 살이었던 그가 견뎌온 세월은 어땠을지 생각하니 내가 하는 것이 다 하소연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잘 견뎠다. 대단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나보다 두 살 어린 사촌이 열 살은 많은 삼촌 같아서 그런 말은 못 하고 냄비 안에 있던 전복 두 개를 꺼내 그의 접시에 놓았다. 토요일 저녁의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착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