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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따서 주는 친구

by 레마누


친구



나는 걸었다


갈 곳 없는 외출에 바람이 따라왔다.


큰길 옆으로 난 하얀 길로 들어서자


바람이 잦아들고, 하늘이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잘 익은 노란 귤들이 담을 넘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딸 수 있을까


입에 침이 고였다.




길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되고


가끔 놀란 새 날아오르는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을 살살 굴려가며


나는 걸었다.




파란 슬레이트를 얹은 집에 사는 친구가


슬리퍼를 끌고 길가에 서 있었다.


안 본 새 머리가 짧아진 친구가 웃길래


따라 웃었더니 가슴을 툭 치며 말한다.




오랜만이야.







해마다 이맘때쯤 서귀포에 사는 친구의 연락을 받는다. 농사일로 바쁜 친구는 미리 약속을 잡는 법이 없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숨을 돌릴 때쯤 카톡이 울린다.




-오늘 뭐 해? 제주시 가려는데.




딱히 할 일이 없다고 하면 친구는 얼굴이나 보자고 한다. 내가 어디서 볼까. 하고 물으면 친구는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한다. 나도 잘 모르지만, 왠지 제주시에 사는 내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다시 묻는다. 한식? 일식? 양식? 중식?


-스파게티나 피자 같은 거. 빵도 좋아




빵을 좋아하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음미하며 음식 먹는 걸 즐기는 친구는 시어머니와 아들 셋,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좋은 곳에서 평소 안 먹어본 것을 먹고 싶었다. 얼마 전 반모임에서 다른 엄마가 추천했던 브런치 맛집이 떠올랐다. 한 번도 따로 연락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가게이름이 너무 궁금해서 톡을 남겼다. 고맙게도 어색하지 않게 추천해 주셨다.




병원진료가 일찍 끝나다며 친구는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원래 학교 근처 사는 아이들이 지각하는 법이다. 나는 십 분 늦게 도착했다. 차를 세우는데 넓은 창 안으로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뭔가에 몰두하는 듯했다. 등만 보였는데, 친구의 얼굴이 따라왔다. 살짝 등을 치며 앞에 앉았더니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왔어? 하고 말한다.




친구는 트렁크에 감귤과 황금향을 가져왔다며 잊어버리지 말고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그런 건 절대 안 잊어버리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친구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브런치를 먹고, 커피 리필을 두 번 하며 오랫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 시간이 아까워 한마디로 허투루 하지 않았다.



올해는 너무 더워서 감귤수확이 늦어졌다는 말을 지구온난화와 연결시켰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걱정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어느 보살집이 용하다는 정보를 공유했다. 십 년만 젊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지금이라도 시작했으니 늦지 않았다고 격려했고, 화가 나서 잠을 못 잔다는 말에 고생이 많았겠다고 토닥거렸다. 중간과정 없이 결론만 말해도 숨이 퍽퍽 쉬어지는 시간을 보낸 친구는 해탈한 듯 웃었다.




그래 넌 웃는 게 예뻐. 인상 쓰면 주름만 늘고 좋을 게 뭐 있니. 웃자. 웃어. 웃으며 그렇게 살자.






제주도의 작고 소박한 동네에서 고만고만한 집을 오가며 깔깔거리고, 숨이 턱까지 차 오르게 높은 동산길을 걸으며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가을이면 늘어진 감귤을 따느라 바쁘던 그 시절의 친구는 지금 감귤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천성이 착하고 부지런해서 묵묵히 개미처럼 일한다. 귤이 맛난 건 기본이고, 판매도 잘해야 한다며 스토어를 열고, 인스타를 운영한다. 친구가 라이브방송을 할 때마다 내가 아는 친구보다 훨씬 예쁘고 요망진 모습에 절로 흐뭇하다. 친구는 앞으로 나가는 중이다.




나는 친구가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 고민하는 것이 좋다. 하늘의 변덕을 견뎌내며 잘 익은 귤을 수확하는 친구의 모습이 좋다. 상품을 주문받으면 정성껏 선별하고, 받을 사람의 이름을 적고 발송하는 친구는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다. 귤을 따는 게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친구의 수고와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길 원한다.




#귤숲 사장님. 올 한 해도 귤 따느라 고생했어. 내년 한가해지면 또 연락해. 나도 네게 뒤떨어지지 않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게. 뭘 하든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가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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