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작은 딸은 한동안 휴식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기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여행을 계획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여행이 아니라 쉼이 있는 느긋한 여행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 3년 동안 공부와 씨름하느라 가뭄에 갈라진 강바닥처럼 황폐해진 마음에 충분한 물을 공급하고, 감각을 깨우고 정서를 길러주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작은 딸의 여행에는 아내가 동행하기로 했다. 큰딸은 박사과정 공부 스케줄로 짬을 낼 여유가 없었고, 나는 두 모녀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뒤로 물러섰다.
작은 딸과 아내는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 이탈리아의 북부에 위치한 꼬모 빙하호수, 그리고 밀라노, 베네치아를 비롯하여 주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들을 여행했다. 마치 더듬이가 잘리어진 곤충처럼 방향감각 없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느린 여행이었다. 아침해가 방안을 깊숙이 침범할 때까지 늦잠을 자고 시장하면 음식을 보충하고 뷰가 좋은 노천카페에 진을 치고 앉아 아끼듯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시간의 제약을 벗아 던진 여행이었다.
작은 딸과 아내는 여행을 하면서 중계방송이라도 하듯이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사진에 담아 내 휴대폰으로 전송해 주었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꼬모 호수의 보석 같은 색깔과 바다 위에 떠있는 신기루 같은 베네치아의 환상적인 건물들, 복잡한 수로를 누비는 낭만적인 곤돌라의 모습 보다도 나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한 작은 딸과 아내의 모습이었다.
10월이 되자 작은 딸은 런던의 한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런던 정경 대 법대를 다닐 때 규모가 큰 한 로펌을 바라보면서 저런 곳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는데 현실의 문에 들어선 것이다.
살림집은 런던 브리지 남단에 위치한 신축 한 지 오래되지 않은 모던하고 편리한 아파트를 렌트했다. 지하철 역이 가까이에 두 군데나 있었고, 집을 나서면 바로 옆 건물은 제법 규모가 반듯한 슈퍼마켓이어서 필요한 식료품이나 물품들을 조달하는 것이 마치 내 창고를 이용하는 것처럼 용이했다. 집 가까이에 공원, 도서관,
음식점들과 카페들이 즐비하게 있었고, 더욱이나 5분만 걸어가면 규모가 큰 전통시장인 버로우 마켓(Boroughmarket)이 자리 잡고 있어서 주거환경으로서는 나무랄 것이 없었다.
작은 딸이 근무하는 로펌까지는 집에서 도보로 20여분 거리에 있었다. 꼬리를 물고 출발하는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실어다 주었지만 출근길은 걷기를 고집했다. 운동의 목적도 있었지만, 잠시라도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는 것보다 자유로움이 좋았고, 날마다 다르게 와닿는 신선한 아침 공기를 피부로 느끼는 것도 기분이 상쾌했다.
템스강을 건너는 것은 주로 런던 브리지를 이용하였지만, 가끔은 캐논 스트리트 브리지나 사우스워크 브리지를 이용하기도 했고 좀 더 걷는 시간을 늘리고 싶은 날은 테이트 모던 앞에 있는 사람 전용의 밀레니엄 브리지를 건너기도 했다.
출근시간과는 다르게 퇴근 시간은 고르지 못했다. 정시에 퇴근하는 날은 거의 없었다. 한두 시간 늦는 것은 보통이었고 자주는 아니지만 일거리가 쏟아지면 자정을 넘기기도 했고 어느 때는 아침이 멀지 않은 이른 새벽에 귀가하기도 했다. 비싼 집 렌트비를 전액 지원해 주고 고액의 연봉에 성과급, 보너스를 주는 만큼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작은 딸은 혼자서 생활할 때는 샌드위치나 샐러드로 식사를 해결했다. 그러나 아내는 함께 있는 동안만이라도 엄마의 정성으로 만든 음식을 먹히고 싶어 손이 많이 가는 한식으로 식단을 준비했다. 한인이 운영하는 H 마트에서 채소와 젓갈, 양념을 사 와서는 깍두기, 총각김치, 배추김치를 담갔고, 식탁에는 생선 구이와 매운탕, 청국장, 순두부를 자주 올렸다.
버로우 마켓 (Boroughmarket)에서 소갈비와 소꼬리를 구입해 갈비찜이며,
꼬리곰탕을 자주 했다. 영국인들이 선호하지 않는 부위의 고기라서 값은 놀라울 정도로 착했다.
아내가 정성을 다해 만든 한식이 놓인 식탁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어디인가 헷갈렸다. 거실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더 샤드(The Shard: 런던에서 가장 높은 빌딩)가 아니었으면 서울의 아파트로 착각할 정도였다.
작은 딸이 아침에 출근하고 나면 아내와 나는 늑장을 부리다가 집을 나서곤 했다. 어디를 가겠다는 뚜렷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였다. 아무 곳이나 발길 닿는 대로 걸어도 눈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볼거리가 무진무궁했다.
런던 타워 브리지를 건너 걷다 보면 유서 깊은 성이면서 궁전인 런던탑이 길을 막기도 했고, 밀레니엄 다리를 건너 걷다 보면 장엄하며 건축미가 돋보이는 성공회 대성당인 세인트 폴이 등장했다. 운동 삼아서 한참을 걷다 보면 트래펄가 광장에 서 있기도 했다. 템스 강변 산책로를 따라 워털루 브리지를 지나 런던 아이(London Eye: 대형 관람차)까지 산책을 하기도 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순례하듯 둘러보기도 했다.
런던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하루하루가 소풍이었다.
2020년이 되었다. 작은 딸은 런던에서 여전히 로펌 생활을 하고 있었고, 아내와 나는 한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2019년 11월부터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19는 세계로 무섭게 번져 나가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1월 31일에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래 빠른 속도로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내는 작은 딸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며 지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3월 초순 런던을 향해 떠났다.
코로나는 그 세력을 확장하며 세계를 강풍처럼 휘몰아쳤다. 유럽은 더 큰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영국은 그 중심에 있었다. 3월 하순이 되자 심각성을 깨달은 영국 정부는 셧다운을 감행했다. 나라 간에 이동을 봉쇄했고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슈퍼마켓과 약국을 제외하고는 모든 상가들은 굳게 문을 걸어 잠갔다.
시민들의 바깥출입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거대한 런던이라는 도시는 고장 난 기계처럼 완전히 멈춰서 버렸다.
작은 딸은 코로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로펌에서 미팅이 있었는데 참석자 중 잠복기에 있는 환자가 있었던지 감염이 된 것이다.
증상이 얼마나 심했던지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고, 끊임없는 기침과 근육통으로 힘들어했다.
아내는 작은 딸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정성껏 만들었지만, 입에 대지도 않았다. 입안이 쓰고 속이 울렁거려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멸치나 고기 국물을 낸 잔치국수는 그래도 조금 입에 댔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병원에 수차례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자신들이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진통 해열제를 꾸준하게 복용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로펌에서 엄청난 건강 보험료를 지불하고 있는데도 전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의료체계가 개탄스러웠다.
아내는 진통 해열제를 구입하기 위해 전쟁 중에 통제된 것 같은 살벌한 거리를 헤매고 다녀야 했다. 들리는 약국마다 동이 나 먼 곳까지 발 품을 팔아야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내는 미래를 훤히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작은 딸에게 닥칠 불행을 예견하고 서둘러 곁으로 갔었을까? 아내가 런던에 입국한 그 시기를 놓쳤더라면 국가 간 셧다운으로 한동안 입국하지 못했을 것이고 작은 딸은 혼자서 어려운 시간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작은 딸과 함께 생활했어도 아내는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까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정신력으로 이겨낸 것인지, 아니면 감염이 되었어도 엄마라는 무서운 힘으로 견뎌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내는 런던에서 3개월 체류기간이 만료되어서 귀국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뒤돌아보고 또 보고를 반복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작은 딸이 회복되어서 로펌에 복귀한 후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내는 작은 딸 걱정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영국의 BBC 뉴스에 밤이나 낮이나 촉각을 곤두세웠다.
뉴스는 매일 불안과 공포만을 가중시켰다. 발생 초기에 가장 피해가 컸던 이탈리아를 제치고 영국은 유럽에서 최대 피해국으로 올라섰고, 사망자수도 유럽 국가 중에서 제일 높았다.
매일 수 만 명의 확진자와, 수백 명 내지는 수천 명의 사망자가 속출하며 기록을 경신하고 있었다. 사망자가 급증해 시신을 담을 관이나 가방이 모두 소진되어 병원 침대 시트를 활용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도 전해졌다.
아내는 들려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경악을 했고,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안갯속을 헤매고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갑자기 발생한 자연재해나 전염병이 안개처럼 드리워져 앞날을 불확실하게 만들어 놓는다. 가야 할 길을 잘 걷다 가도 갑자기 드리워진 안개에 길을 잃고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작은 딸 역시 코로나 19로 인해 원래 계획했던 것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앞날이 불확실한 외국에서 혼자 고생하지 말고 귀국하라고 아내와 나는 오랫동안 집요하게 설득했고, 작은 딸은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지금은 귀국하여 서울의 한 로펌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