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의 마지막 한주를 작은 딸과 나는 하버드 캠퍼스와 그 주위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케임브리지에 있는 하버드의 메인 캠퍼스는 거대한 관광단지 같았다. 여름 방학이 끝자락에 매달려 있었지만 장래 이 학교 입학을 꿈꾸는 많은 나라에서 몰려든 젊은이들,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고 싶은 학부모들, 교육 관계자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장소엔 영락없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300만여 권의 장서와 그리스 신전 같은 외관을 뽐내는 웅장한 와이드너 도서관은 단연 압권이었다. 타이태닉호에 승선했다가 비명에 간 아들 해리 와이드너를 기리기 위하여 부모의 기부금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하버드 야드(Harvard Yard) 중심에 있는 영국 출신 청교도 성직자인 존 하버드 동상 앞에도 언제나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죽기 전, 전 재산과 장서를 하버드에 기증하면서 이 대학과 연을 맺었다. 그의 동상 발을 만지면 본인이나 후손이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는지 왼쪽발은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하버드 아트 뮤지엄도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규모는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유명 미술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고, 반 고흐, 클라우드 모네, 피카소, 잭슨 폴록 등 유명 화가의 숱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캠퍼스 내에 이런 미술관이라니 상상 밖이었다.
로스쿨은 하버드 야드(Harvard Yard)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사이언스 센터와 실험실 건물들이 즐비한 지역을 지나자 웅장한 랑델 도서관(Langdell Library)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로스쿨의 초대 학장의 이름을 따서 1906년 석조로 지어진 건물로 길이가 길고,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법학 도서관으로서는 세계에서 최대 규모로 200만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었다. 하버드 로스쿨의 또 다른 핵심 건물은 오스틴 홀(Austin Hall)로 1812년에 세워졌는데 아직도 학생들의 수업과 모의재판 장소로 사용되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법대 건물이었다.
로스쿨은 크고 작은 19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기숙사 건물 7개 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작은 딸이 신청한 기숙사도 그중 한 곳이어서 수업 시작 임박해서 출발해도 지각할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하버드 메인 캠퍼스 앞의 메인스트리트를 따라 자리 잡은 스타벅스와 베이커리,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로스쿨 재학 시 즐겨 찾았다는 햄버거 집과 펍을 방문하기도 했다.
쿱(COOP:학생조합)에 들러 서적, 의류, 문구류, 기념품 매장을 둘러보며 필요한 물품과 학용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찰스 강 (Charles River)을 건너 보스턴에 위치한 의과대학과 비즈니스 스쿨도 견학했다. 어디를 가나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잔디밭과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개성을 살린 웅장한 건물들이 보기 좋게 들어서 있었다.
옆 동네이기는 하지만 MIT 캠퍼스를 찾아 거닐고 학생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고, 펍에서 시원한 맥주로 더위와 피로를 떨구기도 했다.
9월 초 작은 딸은 입학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제 공부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버드 로스쿨이 얼마나 혹독하게 학생들을 교육시키는지는 전 한 학장이 했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한 1학년 생(One L)을 대상으로 한 오리엔테이션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한다.
“여러분! 옆의 학생들을 잘 보세요. 학기말쯤 이면 두 명 중 한 명은 필시 못 보게 될 것입니다.”
공부가 힘들어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한 이 말 한마디만 들어도 살이 떨리게 했다.
이 어려운 과정을 작은 딸은 잘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다.
하버드 로스쿨의 수업 방식은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유명하다. 초대 학장이던 랑델이 고대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한 것처럼 학생들은 답변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방법이다.
세계적 석학인 교수들은 수업시간에 무작위로 학생을 지명하여 질문을 던졌고, 대답이 미흡하면 많은 학생들 앞에서 인격적인 모독까지 불사했다. 심지어는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학생들은 아예 클래스에 들어오지 말라고 자제력을 잃고 격앙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런 공포스러운 수업방식을 학생들은 콜드 콜링(cold calling)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수업에 임할 때면 제발 오늘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작은 딸은 수업에 대비하여 판례집을 포함한 자료를 하루에도 수백 페이지를 읽고 나름대로의 창의성을 발휘하여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밤잠을 줄이거나 아니면 꼬박 새우더라도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입학 후 그다음 해, 2학년이 시작되는 9월은 학생들에게 두려움과 설렘을 주는 달이었다. 미국 전역의 대형 로펌들이 로스쿨 캠퍼스로 찾아와 학생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한 취업 인터뷰를 가지기 때문이었다.
인터뷰는 캠퍼스 근처에 자리 잡은 챨스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숱한 학생들은 룸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개인에게 할당된 인터뷰 시간은 보통 20여분이지만 불편한 옷차림에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하루 4 – 5곳을 돌며 면접관을 대해야 하는 것은 고욕이었고 진이 다 빠지는 일이었다.
5일 동안 진행되는 인터뷰에서 20여 곳 이상의 로펌과 인터뷰를 하기 때문에 어느 곳을 했는지 안 했는지 헛갈릴 정도였다.
인터뷰가 끝나면 그다음은 콜백(Callback)이라고 하는 2차 인터뷰가 연이어 시작되었다. 20여 곳이 넘는 로펌과 면접을 가졌어도 콜백을 받는 곳은 몇 군데 되지가 않았다. 이때 인터뷰는 1차와는 다르게 보통 2 – 3시간, 길게는 4 – 5 시간이 걸려 여러 명의 면접관 앞에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통과한 학생들은 로펌으로부터 러브콜(Love call)을 받는다. 그러나 여러 곳의 로펌에서 연락을 받아도 최종 한 곳을 선택해야 하고 그다음 해 여름방학, 즉 2학년이 끝난 후에는 대상 로펌에서 인턴과정을 거치게 된다. 근무하면서 이렇다 할 문제점이 없으면 최종적으로 채용되고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로 일을 하게 된다.
작은 딸은 콜백 인터뷰를 통해 뉴욕에 있는 대형 로펌 일곱 곳에서 러브콜을 받았으나 영국 런던에 지점이 있는 한 로펌을 선택했다. 런던에서 근무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딸은 1학년 때에는 캠퍼스 안에 있는 기숙사 생활을 했으나 2학년이 되면서는 하버드 아트 뮤지엄에서 가까운 학교 소유의 아파트를 렌트했다. 2 베드룸과 원룸이 있었는데 혼자 생활하기 때문에 원룸을 선택했다. 방은 적당한 크기였지만, 주방은 제법 커서 4인용 식탁과 의자를 놓고도 음식을 조리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작은 딸을 보러 가면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시간이 부족한 작은 딸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따뜻한 밥상을 준비하곤 했다.
아파트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H 마트가 있었다. 한인이 운영하는 대형 마트였는데 다양한 한국 제품들이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싱싱한 채소와 과일, 육류나 생선도 구비되어 있었다. 나는 수시로 H마트를 드나들며 식재료를 구입해 와 된장찌개. 김치찌개. 닭볶음탕, 생선구이, 불고기, 잡채, 육개장, 닭개장 매운탕 등을 번갈아 준비했다. 가끔은 스팀으로 쪄주는 신선한 랍스터를 사 와서 별식으로 즐겼다.
작은 딸은 나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에도 공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학교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시간을 보냈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다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집에서도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책상에 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주말이 되어서야 몇 시간 짬을 내어 역사가 깊으면서도 세련되고 현대적인 멋을 풍기는 보스턴을 향하곤 했다.
현대 미술관을 관람하고,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인 보스터니안의 휴식처인 보스턴 커먼을 거닐었고, 볼거리, 먹거리가 풍성한 퀸시마켓에서 여러 나라의 음식을 맛보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보스턴 하버워크에서 수평선을 바라보기도 했다.
작은 딸은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을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쉼 없이 달려왔다. 심지어는 방학도 마찬가지였다. 1학년을 마친 여름방학에는 경력을 쌓기 위해 서울에 있는 한 대형 로펌에서 인턴 생활을 했고, 2학년을 마친 후에는 앞으로 변호사 생활을 하게 될 런던의 한 로펌에서 인턴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질주하기만 하던 작은 딸은 3년 만에야 멈춰 설 수 있었다. 2018년 5월 하순 졸업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랑델 도서관 앞 너른 잔디밭에 마련된 식장에는 졸업생들과 가족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눈부신 오월의 햇살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모두의 표정은 해처럼 밝았다.
성대하게 거행되는 졸업식을 아내와 큰 딸 그리고 나는 벅찬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까만 졸업 가운과 모자를 쓴 작은 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고 감동스럽기도 했으며 자랑스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