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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Mar 13. 2024

작은 딸의 새로운 도전





작은 딸은 런던 정경대 (LSE) 법대를 졸업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학교를 떠나야 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른 나라와 다르게 영국의 대학은 3년제이기 때문에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갔다. 

학교에 몸담고 있는 동안 장서로 장벽을 이룬 도서관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이동 없이 많은 시간을 책과 씨름을 했고, 기숙사에서도 그런 습관이 유지되었다. 전공에 관한 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섭렵했다.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의 장에 빠지기도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취미가 같은 친구들과 교류하였고, 한인 학생들과 친목을 다지고 외국학생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는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작은 딸은 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에 있는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 하고 싶은 생각을 가졌으나 이내 접었다. 인턴 경력도 없고 실무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취업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3년 동안 공부한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크고 무거운 업무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우선 실력과 경력을 더 쌓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취업이 하늘에 별따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작은 딸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처음 지원한 H그룹 법무팀에 입사했다. 까다로운 시험과 여러 차례의 면접을 거친 후였다. 
친척들과 지인들의 축하와 격려 말이 쏟아졌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인생을 즐겨라.

든든한 직장 구했으니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라는 덕담까지 받았다 


작은 딸은 일을 시작하였지만 직장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함만 가중되었다. 

경력이 없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의견을 제시해도 네가 뭘 아느냐는 듯이 무시되는 수직적인 직장문화가 당혹스러웠다.

오전에는 빈둥빈둥 시간을 흘려보내고 오후부터 일을 시작하여 퇴근시간을 넘긴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일을 마치고도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나서지 못하는 효율적이지 못한 업무시간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 든 상사들의 입맛에 맞춰 특별식을 찾아 순례하듯 하는 회식도, 주량과는 상관없이 윗사람들로부터 술 마시기를 강요받는 것도 고욕이었다. 

금방 지나가버리고 마는 젊은 시절을 이렇게 생활하며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좀 더 다른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한국에서 1년 동안 경력을 쌓았으니 런던에 있는 로펌에 지원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자신의 성장에 바람직한 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국에 있는 로스쿨에서 공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의 로스쿨은 영국의 법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영국의 법대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들이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하지만, 미국의 로스쿨은 대학에서 4년 동안 공부를 한 후 3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된다. 대학에서 무슨 전공을 했던 상관이 없지만 자기 분야에서 지식을 넓힌 후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 달랐다. 그리고 로스쿨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길든 짧든 실무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더 심도 있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사표를 낸 작은 딸은 본격적으로 로스쿨 진학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로스쿨에 입학은 LSAT 점수가 좌우했다. LSAT은 로스쿨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치르는 입학시험으로 미국의 법대입학위원회 (LSAC : Law School Admission Council)에서 주관했다. LSAT 시험은 응시자의 분석, 논리 및 독해 능력을 평가하지만 단순한 지식이나 문제 풀이 능력이 아닌 인문학적 소양을 평가했다.

LSAT시험은 1년에 수차례 있는데 여러 차례 응시할 수 있고 그중 가장 높은 점수로 학교를 지원하게 된다. 

최저 점수는 120점이고 최고는 180점으로 되어있다. 참고로 탑 10 로스쿨에 합격하려면 170점 이상은 되어야 가능했다.


작은 딸의 처음 LSAT 시험에서 받은 점수는 168점이었다. 낮은 점수는 아니었다. 상위 명문대학을 제외하고는 입학이 가능한 점수였다. 작은 딸은 그 점수에 만족하지 않고 이어서 3차례나 시험을 더 치렀다.

두 번째 시험은 1점이 오른 169점이었다. 두 달 가까이 책과 씨름한 결과가 겨우 1점 오른 것이 허무했다. 하지만 시험을 여러 차례 치러도 1점도 올리지 못하는 학생도 있었고 심지어 뒷걸음치는 점수를 얻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작은 딸은 3번째 시험에서 172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점수로는 최상의 로스쿨은 부족한 점수였다. 학교를 지원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을 무렵 마지막으로 시험에 응시했고 174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로스쿨 입학신청은 공부를 시작하기 전 해 9월부터 즉, 1년 전부터 시작하여 다음 해 2월에 마감된다. 

이렇게 오랜 기간을 두고 입학신청을 받는 것은 수시 전형(Rolling Admission)이기 때문이다. 이는 원서접수 기간을 짧게 정하고 마감 후 일괄적으로 검토하여 정해진 인원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6개월 이상 계속 원서를 받으면서 지원자 중 학교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충족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때그때 선발하는 방식이다.    


작은딸은 미국 법대입학위원회 (LSAC)에 희망 학교를 신청했다, 대학교 성적이 우수했고, LSAT점수도 174점이었으며 1년 동안 실무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하버드, 시카고, 콜롬비아 세 학교를 지원했다. 모두 미국의 200여 개 로스쿨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학교였다. 

제출할 서류들을 꼼꼼히 챙겼다. 입학 지원서, 자기소개서 (Personal Statement), 직장생활 경력서, 추천서, 학부 학업 성적(GPA : 평점), 그리고 LSAT시험 점수였다. 

자기소개서는 한 장을 작성해서 모든 학교에 보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입학 사정관들이 볼 때 성의가 없다고 생각할 것 같아 학교마다 지원하는 이유를 다르게 썼다. 

작은 딸은 9월 말에 입학 신청을 했다. 상식적으로 일찍 지원을 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았다. 늦을수록 이미 확정된 합격자 수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지원자들과 경쟁이 심해질 수 있고, 학교에서 지원하는 장학금도 한계가 있으므로 먼저 지원한 사람이 받을 확률이 그만큼 클 것 같았다.


학교를 신청하고 3달이 지나자 우편으로 결과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내온 곳은 시카고 대학으로 1월 초였고, 이어서 1주일 후에 콜롬비아, 1월 20일경에는 하버드에서 통보를 받았다. 세 학교 모두 합격이었다.

이제는 어느 학교를 선택할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세 학교 모두 똑같은 조건이라면 하버드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시카고와 콜롬비아에서는 만만치 않은 장학금을 제시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결정을 보류한 채 고민에 빠졌던 작은딸은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하버드 로스쿨이었다. 


2015년 8월 초 작은 딸과 나는 뉴욕을 향해 출발했다. 로스쿨 시작은 9월 초였지만, 뉴욕에서 여행을 즐긴 후 하버드가 있는 케임브리지로 가서 환경을 적응시키는 훈련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을 빠져나오자 8월의 열기가 훅 달라붙었다. 불덩어리 같은 더위였으나 오랜만에 찾은 설렘 때문인지 그것마저 감미롭게 느껴졌다. 감개무량했다. 2003년 뉴욕을 떠난 후 무려 12년 만이었다. 영국 런던만 부지런히 오가는 사이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훌쩍 넘어 있었다. 

뉴욕에서의 일과는 분주했다.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 바둑판 위에 흑과 백 돌만큼이나 많아서 방문 계획을 세우는 것도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현대미술의 중심지인만큼 미술관 순레부터 시작했다. 모마(MoMA), 구겐하임, 휘트니, 뉴 뮤지엄 첼시와 소호의 크고 작은 갤러리 등 갈 곳이 줄을 이었다. 

센트럴 파크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휘젓고 다니고, 허드슨 강가에 앉아 빨간 꽃처럼 물든 노을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켜보기도 했다. 오래전 우리 가족의 아지트였던 유니온 스퀘어에 위치한 반즈 앤 노블에서 책을 넘기며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우리가 살던 집(아파트)도 찾았다. 12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마치 그때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래 전의 우리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파트 단지 내 소공원에는 고목들이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들을 무겁게 이고 있었고, 청설모들이 나무 타기 경주라도 하듯이 분주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집 주위에 있었던 스타벅스, 애플 비, 보스턴 치킨,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베이글 집도 시간이 비켜간 듯 변함없이 버티고 없었다. 

작은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방학이라 텅 비어 있었지만, 역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모든 것들은 한결같이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였지만, 변한 것은 작은 딸과 나뿐이었다. 

친구 S가 잠들어 있는 뉴저지에 위치한 조지 워싱턴 메모리얼 파크 공원묘지도 찾았다. 친구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서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나는 가져온 꽃을 친구 앞에 놓고 한동안 눈을 감은채 무언의 대화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뉴욕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남의 행복을 방관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시간이 요술을 부려 눈을 떠보니 3주가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 뉴욕에서의 시간은 마침표를 찍고 하버드가 있는 케임브리지를 향해 떠나야 했다. 작은 딸과 나는 맨해튼 8th 애비뉴, 42번가에 있는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에서 보스턴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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