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준 Apr 24. 2024

영웅




자기의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웅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진실하게 수행한다면,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웅입니다.

ㅡ 헤르만 헤세 ㅡ


영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큰 딸은 한국에 귀국해 직장생활을 했다.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상대해야 하는 일상 속에서 어려운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1학기에 외국에 나가서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10년 이상을 체류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매끄럽게 구사하지 못했다. 대화를 하려면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뜸을 들였고 상항에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큰딸의 이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했지만, 초면인 사람은 언어장애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상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큰딸은 오랜만에 귀국한 터라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과는 소식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나이가 들어서 친구를 사귄다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 일이어서 혼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나름대로 혼자 즐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일렉트릭  기타를 배우며 연주를 했고, 오토바이 타는 것을 즐겼다. 헬스장이나 수영장에서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겨울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나는 계절이었다. 겨울 스포츠의 꽃인 스키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키장이 개장하는 11월 하순부터 다음 해 3월 초까지는 주말이나 공휴일은 출근하듯 스키장에 찾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강원도의 유명 스키장을 향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서울 근교의 스키장을 이용했다.

스키장은 그전과는 다르게 스노보드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큰딸도 당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두 번 개인 지도를 받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속도가 빠른 만큼 느끼는 쾌감도 달랐다.

그 매력에 빠져 장비 일체를 구매했고 스키가 아닌 스노보드를 즐겼다. 

나는 큰딸이 스키장을 향할 때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동행했다. 스키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젊어서는 꽤 즐겼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신감이 바닥으로 내려앉았고 안전사고의 위험을 생각하며 자제했다. 내가 동행하는 이유는 집으로 돌아올 때 피곤한 큰딸을 대신해 운전을 하기 위해서였다.


몇 년 동안 직장생활에 안주했던 큰 딸은 무언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지 못하는 새처럼 한정된 장소에서 바닥만 바라보고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스카이라고 불리는 학교 중에 한 곳이었다. 원래는 석사코스만 하기로 마음먹고 발을 들여놓았으나 막상 학위를 받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깊은 고민 없이 박사과정으로 이어졌다.

평소에 즐기던 취미 생활이나 체육활동을 모두 접어두고 학교의 실험실과 연구실에 올인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큰딸은 내친김에 자신의 연구를 확장시키고 싶었다. 포스트 닥터 코스를 밟기로 했다. 미국 대학의 웹사이트를 접속해 자신의 연구를 심화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지원할 수 있는 대학들이 여러 곳 있었지만, 아무래도 인지도 높은 학교가 시설뿐만 아니라 연구환경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예일(Yale)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 두 곳에 커버 레터(Cover Letter), 즉 자기소개서와 이력서(CV), 추천서를 이메일로 연구 책임자(PI)에게 보냈다.  

정해진 날자, 시간에 맞춰 영상으로 면접을 치렀고, 박사 논문에 관한 프레젠테이션도 했다.

다행히 지원한 두 곳 모두 합격되었고 최종적으로 예일대학교를 선택했다.


예일대학교는 미국 동북부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New Haven)에 자리 잡고 있다. 도심의 절반이 예일대 캠퍼스가 차지하고 있는 대학 도시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기차로 2시간이 소요된다. 암트랙이라는 미국 전역과 캐나다 일부까지 연결하는 기차를 타도 1시간 40여분으로 거의 비슷했다. 다른 도시를 경유하느라 우회하기 때문이었다.


큰딸은 2022년 6월부터 현재까지 예일대학교의 한 랩에서 포스트 닥터 코스를  계속해 오고 있다.

눈코 뜰 사이 없는 바쁜 시간의 연속이다. 주말에도 실험실에 들려 실험 진행 상황을 점검하며 몇 시간씩 머물러야 했다.

동굴 같이 답답한 실험실에 매일 몸을 가두고 가시적인 성과 없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한 일일까? 큰딸을 볼 때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동굴 속에서 견뎌낸 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큰딸은 연구실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인 다운타운에 위치한 원룸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꽤 넓은 거실과 방이 있어서 내가 기거해도 불편함이 없었다. 

큰딸은 아침 일찍 출근하고 오후 6시 이후에 퇴근하기 때문에 나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주말이 되어서야 함께 캠퍼스를 산책하고, 채플가와 요크가의 북동쪽 코너에 있는 예일대 아트 갤러리를 찾기도 했다. 3층으로 된 규모가 큰 갤러리에는 고대부터 중세, 현대의 다양한 미술품들이 20만 점이나 소장되어 있는 메이저급 미술관이었다. 

이곳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가까운 곳에 예일 대학교 영국 미술 센터(Yale Center for British Art)가 있는데, 영국의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현대미술 작가들의 특별전이 끊이지 않아 흥미롭게 둘러볼 수 있는 매력적인 미술관이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는 다운타운에서 한참 벗어난 East Rock Park이라는 바위 절벽이 있는 언덕까지 산책을 하기도 했다. 오가는 길에 만나는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예쁜 집들, 잘 가꾸어진 공원에 흐드러진 꽃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하늘을 살짝살짝 보여주는 숲 속 길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뭐니 뭐니 해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뉴 헤이븐의 자랑인 피자와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이름난 만큼 가게들도 많았다. 프랑크 페페 피자집은 항상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불편했지만, 크고 얇고 바삭한 크러스트와 풍부한 토핑의 피자를 먹을 때는 감탄만 쏟아져 나왔다. 애슐리 아이스크림 집은 종류도 다양하고 입에 착착 감기는 독특한 맛이 좋아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는 인기 있는 명소이다. 


실험실과 연구실에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을 하는 큰딸의 유일한 탈출구는 빵을 굽는 일이었다. 경직된 몸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제빵기술을 배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레시피를 참고했을 뿐인데 구워 낸 빵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가끔 빵을 만들어 실험실에 가지고 가면 동료들과 테크니션, 교수는 감탄하며 엄지를 들어 보였고, 당장 베이커리를 오픈해도 대박 날 것이라는 말을 보태기도 했다.


작은딸은 2020년 10월부터 서울의 한 로펌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 생활에 그다지 만족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기야 폭주하는 업무에 하늘 한번 제대로 올려다보기 힘든 팍팍한 삶에 만족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친하게 지내던 동료 중 한 명이 퇴사를 하고 새로운 것을 공부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연봉이 턱없이 적지만 즐거운 일을 찾아 직장을 옮겼다. 누군가는 카페를 차리고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르꼬르동블루에서 제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떠났다. 이런 말을 하면서 자신도 그만두고 싶다는 심정을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했다.  

한동안은 로펌을 휴직하고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를 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로펌에 복직해 근무하고 있지만 그 공부에 미련이 남아 본격적으로 박사과정을 할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다. 서울에 있는 대학보다는 미국에 있는 대학에 무게가 실려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무엇이든 변한다. 하고 싶은 일도 변한다.

다가오는 미래에 두 딸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나는 모른다.

작은 딸은 다른 분야를 공부해서 교수가 될지도 모르며,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을 할지도 모른다. 자영업을 할 수도 있으며 글을 쓰는 일을 할지도 모른다.

예일 대학에서 포스트 닥터 코스를 밟고 있는 큰 딸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교수를 할지, 연구소에 가게 될지, 제약회사에서 일하게 될지 모른다. 아니면 빵집을 하겠다고 선언할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것은 두 딸이 무슨 일을 하던 본인이 하는 일에서 성취감과 삶에 의미를 느끼며 행복이 가득한 삶이었으면 좋겠다.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진실하게 수행하는 영웅이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지난 일을 뒤돌아보며 두 딸과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려 정리해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더 미루다 가는 기억이 희미해져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한몫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절실하게 쓰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하게 된 것은, 추억을 먹고사는 나이가 되었을 때 오래된 추억의 사진을 보듯이, 회상할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해 놔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