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법들은 고려와 일본에 대한 투자법이었다
왕안석의 신법 중 1069년 7월부터 가장 먼저 시행된 균수법(均輸法)은 물길을 통해 물자를 운반하는 일을 책임지는 발운사(發運司)의 설치와 운영을 위한 조례였다. 균수법(均輸法)에 근거해 조운(漕運)을 전담하게 된 발운사는 사실 일본의 차를 중국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담당하기 위한 관청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수출되는 차(茶)는 그 품질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라는 지리적 제약 때문이었다. 일본 하카타와 송나라 명주(영파)를 잇는 원양 항해로 차(茶) 같은 귀한 상품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중국뿐이었다. 예로부터 차나무가 자생해 차를 많이 생산하는 일본이 최고가로 팔리며 전 세계의 각광을 받는 차(茶)를 교역하지 않은 것은 바다 건너까지 차(茶)를 실어 나를 용기(容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피할 수 없는 수분과 습기, 그리고 소금기에 배에 실은 차(茶)들이 모두 변질되어 버렸기에 자기(瓷器 porcelain)라 불리는, 잘 깨지지 않는 첨단 세라믹 그릇이 개발되기 전까지 일본의 차는 그저 일본 안에서만 쓰이는 내수품일 뿐이었다. 일본 하카타(博多)항으로 가기 위해 주산군도(舟山群島)를 떠나는 송나라 대선(大船)들엔 안이 텅 비어있는 청자(靑瓷)들이 빈틈없이 실려 있었다. 일본에 가서 차를 실어오기 위한 운반용기들이었다. 방수와 방습이 완벽하면서도 잘 깨지지 않는 청자들에 담겨 바다 건너 실려 온 값싼 일본 차(茶)들은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며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서하(西夏)에 매년 보내야 하는 차(茶) 2만 근과 비단 그리고 은(銀)은 엄청난 부담을 송나라 조정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안겨주고 있었다. 우선 변질되지 않은 차(茶) 2만 근(斤)을 서하의 수도인 흥경(지금의 은천)까지 운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 공물을 인수할 때마다 서하의 관리들은 변질을 지적했고 변상을 요구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상품들을 수출해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 반드시 하서회랑을 이용해야만 했던 송나라로서는 결국 고가(高價)의 청자에 찻잎을 담아 운송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서하로 가는 공물 운송단은 도적들에겐 복권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둘 다 초고가인 차(茶)와 청자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은 도적떼가 횡행했다. 서하로 가는 공물 운송단에는 임의로 부과된 직역[職=부역:정부(各級 政府)의 여러 잡무를 대신 처리해야 하는 의무]으로 참여한 많은 일반 백성들이 있었다. 만약 갑작스레 부과된 직역에 의해 수송하고 있는 물품이 잘못될 경우 그들은 변상해야 했다. 그게 직역의 의미였고 국법이었다. 변상 때문에 파산하고 자살하는 백성들이 속출했다. 모역법(募役法)이 만들어져 이 폐단은 없어졌다. 모역법에 의해 그동안 부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던 관리들과 대상인들, 사찰(寺刹)과 사원(寺院)의 승려들에게 조역전(助役錢)이 부과되었다. 모든 농민들에게는 재산등급별로 차등을 둔 면역전(免役錢)이 부과되었다. 이 돈을 내면 누구나 직역의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성된 기금은 직역(부역)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맞는 보수를 지급하는데 지출되었다. 직역이 필요할 때마다 사람을 모집한다는 방(榜)이 거리마다 내걸렸다. 부역의 금납화(金納化)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서하의 수도 은천으로 향하는 공물 운송단엔 최정예 용병(傭兵)들이 모집되었다. 최정예 용병들에겐 최고의 보수가 지급되었고 그들이 지키던 차(茶)를 담은 청자 공물을 강탈하려던 도적떼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매년 약속한 차(茶) 2만 근의 몇 배나 되는 차(茶)를 파손 배상 명목으로 지급해야 했던 서하로의 차(茶) 공물은 이제 더 이상 추가되지 않았다. 실크 로드를 오가는 소그드(Sogdian) 상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공짜 파티는 없다는 걸 의미했다.
※ 표지 사진 출처: 바이두 - 중국에 있는 왕안석의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