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기와 장수와 왕안석

청기와 장수는 왕안석의 신법이 만들었다

by 역맥파인더


1. 청기와 장수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의종(毅宗) 11년(1157) 4월, 만월대라 불린 고려의 정궁 동쪽에 이궁이 건설되었다. 이궁의 여러 건물 가운데에 양이정(養怡亭)이란 건물이 신축되는데 놀랍게도 양이정의 지붕은 온통 청기와로 덮여졌다고 한다. 당시 최고급 도기로 전 세계에서 중국과 고려에서만 생산되었던 청자는 황실과 일부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초고가 상품이었는데 그런 청자를 만들 때 사용하는 똑같은 재료와 기술로 만든 기와를 건물 기와로 사용해 지붕을 덮었다고 하니 고려 의종때의 영화를 웅변하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무신정변(1170) 이 발발하고 뒤이어 의종이 이의민에 의해 등골뼈가 부러져 경주 곤원사 북쪽 연못에 던져지자 청기와는 다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드는 기술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청기와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 생산되던 청자도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역시 사라졌다. 이렇게 사라져 버린 고려청자와 청자기 기술을 당대 사람들은 청기와 장수란 말을 만들어 역사에 남겼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청기와 장수란 말의 뜻은 어떤 사람이 청기와 굽는 법을 알아냈으나 이익을 혼자 차지할 생각으로 자식에게조차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있다가 죽어버려 그 바람에 비법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매우 고약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비법이 전수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익을 혼자 차지하려고 죽어가는 마당에도 자기 자식에게조차 알려주지 않았다는 건 매우 믿기 어려운 상당히 의심이 가는 언급이다. 이익 때문에 자기 자식에게조차 감추었다는 것은 그 일을 행한 자들이 진짜 아버지가 아님을 강하게 암시한다. 모든 죽어가는 부모는 살아봐서 잘 안다. 세상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자식들이 살 떨리도록 애인 해진다. 이익에 짓밟히는 애처로움이라면 천륜이 아니다.



2. 왕안석 신법 시행의 진짜 목적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에 의해 자행된 무신정변으로 끝장난 고려의 부귀영화는 사실 1009년 고려 현종이 개발한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으로 황차(黃茶)를 개발, 수출함으로써 번영을 시작하고 1069년 왕안석의 신법으로 시작된 송(宋)나라의 혁명적인 대외경제정책으로 폭발적 발전을 구가한 선물 같은 160여 년의 호황이었다. 왕안석이 주도한 것으로 기록된 희녕변법(熙寧變法)은 그러나 왕안석이 아니라 북송 6대 황제였던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방패 삼아 황실과 왕조의 운명을 걸고 감행한 경제혁명이자 세계화 전략이었다. 23살의 나이로 1067년에 즉위한 신종은 왕안석을 강녕부(지금의 남경 일대) 지사로 임명해 장강 하류의 차 무역(茶 貿易) 실상을 상세히 파악하게 한 후 다음 해엔 수도 개봉으로 불러올려 황제의 조칙(詔勅)을 기초하는 한림학사로 등용해 자신의 구상을 실현할 방안을 연구하게 했다. 그 결과로 대내 경제와 대외 경제 그리고 재정을 통괄해 경제혁명을 일으킬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가 설치되었다. 신종은 염철|(鹽鐵)과 탁지(度支), 호부(戶部)로 삼분되어 각각 염철사와 탁지사, 호부사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관리되던 대내외 경제 관리(管理)를 모두 제치삼사조례사(삼사) 예하에 두어 재상이 통합감독 지휘하게 했다. 1069년 신종은 왕안석(王安石)을 제치삼사조례사를 맡는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하고 여혜경과 소철을 검상문자관(檢詳文字官)으로 함께 등용해 균수법(均輸法)과 청묘법(靑苗法)으로 대표되는 희녕변법을 전격 시행했다. 그 신법들의 진짜 목적은 철저히 숨겨진 채로.


대지주와 대상인을 억제하고 자영농과 중소상인을 보호하면서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이른바 경제민주화로 알려진 왕안석의 신법들은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대대로 중국 왕조들에게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던 주요 무역로(貿易路)들에 대한 통제권을 모두 잃어버리고 주변 군사강국들에게 배상금을 바치느라 재정적자에 허덕여가던 희망 없는 송나라 황실이 일대 반전을 꾀하고자 시행한 혁명적 시도였다. 막대한 교역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무역로(실크 로드)를 이용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하서회랑(河西回廊:무위, 장액, 주천으로 이어지는 길)의 지배권은 이미 1044년 인종(仁宗) 때부터 서하(西夏)에게 빼앗겨 있었다. 게다가 초원로(草原路)라 불리던 태초부터 있어온 무역로 지배권은 이미 인종의 아버지 진종(眞宗)대인 1005년에 전연지맹(邅淵의 盟約)으로 불리는 조약에 의해 요(遼)나라에 넘어간 지 오래였고. 중국을 대륙 서쪽 끝까지 연결시켜주던 교역로들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빼앗긴 송나라로서는 기댈 데라곤 마린 로드(marine road)라 불리는 장강과 바다를 이용한 해상 무역로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지배하고 있는 해상 무역로를 통해 국제무역을 활성화하고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는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신종이 택한 정책은 일본차(日本茶)의 중계무역이었다. 일본차를 국제 무역품으로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송나라 조야의 원로들이 극렬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초원로(草原路)와 실크 로드(silk road)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의 매서운 감시가 동시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송(宋) 태조(太祖)의 급사(急死)와 송 태종(太宗)의 어둠 속 도끼 소리(燭影斧聲)를 다시 들려주고 있었다.


Silk_route.jpg 실크로드와 마린로드 <출처: Wikimedia Commons>


※ 표지 사진 <출처: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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