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신농(炎帝神農)이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농사(農事)는 곡식(穀食)을 기르는 일이 아니라 차(茶)를 만드는 일이었다. 차(茶)를 만드는 일이란 게 처음에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기후가 변하고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차(茶) 나무가 마을 주변이 아니라 깊은 산골짜기에 생장하면서 그런 곳에 있는 차(茶) 나무를 찾아내 그 나무에서 찻잎을 채취하고 그 채취된 찻잎들을 마을로 가져와 가공해 차(茶)로 만들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만든 차(茶)들로 새로운 찻잎들이 차(茶) 나무에서 새로 솟아나는 다음 해 단오 때까지 최고의 보관, 저장기술을 사용해 버텨야 하는 일이 농사가 되었다. 그래서 농사는 한다고 하질 않고 짓는다고 했다. 계속 더 나은 기술과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농사(農事)의 시작은 찻잎을 채취할 차(茶) 나무를 선정해 그 차(茶) 나무에 특수 설비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채취해 그 찻잎들을 실어 마을로 보내는 일은 차(茶) 나무 자체가 깊은 골짜기에 수림(樹林)들과 덤불들 속에 있는 관계로 그 자체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찻잎 채취(採取)와 운송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최소 삼 개월 동안 수없이 오고 가는 인공 교통로를 수림과 덤불들로 가득 찬 곳에 설치해야 하는, 노동과 기술이 모두 최고도로 동원되어야 하는 공사였다. 이 인공 교통로를 진(辰)이라 불렀다. 진(辰)이라 불린 이 설비는 그러나 신농이 가르쳐 준 애초의 농사(農事)에는 없었다. 신농이 가르쳐 준 농사는 그저 차(茶) 나무를 찾아내 찻잎을 채취해 끓는 물에 담가 우려먹는 거였다. 즉 농사(農事)가 아니었다. 농(農)이란 글자에 있는 진(辰)이라는 기구를 개발해 신농이 가르쳐 준 차(茶) 만드는 일을 농사(農事)로 만든 건 우리 민족이었다. 진번(辰蕃)과 진한(辰韓), 진국(辰國)이란 우리 민족의 엣 나라 이름들이 그 증거다. 발해(渤海)를 진국(震國)이라 하고 궁예의 후고구려를 마진(摩震)이라 했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신농이 가르쳐 준 대로 찻잎을 끓는 물에 넣어 우려먹자 수인성 전염병이 크게 줄어들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더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유랑하며 수렵 채취로 생명을 유지하던 남정네들이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마을로 돌아와 정착해 살게 되면서 남정네들만이 할 수 있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해내지게 되었다. 그렇게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차(茶) 나무들을 이용해 차(茶)를 만들던 일이 기후변화와 사람들의 증가, 그리고 마을로의 집중등으로 인해 점점 더 멀리 차(茶) 나무를 찾아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부터 주변 마을들 간 좋은 차(茶) 나무를 선점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져 갔다.
동지(冬至)는 이제 새로운 차(茶)를 만들어 내야 할 새로운 한 해가 왔음을 모두에게 알리는 날이었다.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채취해 차(茶)로 만들어 수출용 수레에 적재(積載)를 완료해야 하는 단오(端午)까지 쉼 없이 내달려야 하는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는 걸 알리는 날이었다.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채취해 차를 만드는 농사(農事)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은 한식(寒食)이었는데 이날은 동지로부터 정확히 105일째 되는 날이었다. 한식(寒食)은 달의 모양으로 날짜를 계산해 찾아내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움직임으로 찾아내는 동지(冬至)로부터 무조건 백다섯(105) 날을 헤아려 만나는 아침이었다. 동지와 같이 태양의 움직임으로 계산되는 청명(淸明) 대신 한식(寒食)으로 차(茶) 만드는 일의 기준을 삼은 것은 동지와 한식 사이의 한가운데에 달의 모양으로 정해지는 정월대보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설날보다 대보름날에 더 많은 민속(民俗:folklore)을 가지고 있는 건 한식(寒食) 때부터 시작될 찻잎 채취 작업과 찻잎 제조 작업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정월 대보름날에 우리 민속(民俗)의 거의 대부분이 몰려 있는 이유는 그날이 동지 이후 만들어 온 찻잎을 채취하는 작업에 소요되는 새 장비와 새 자재들을 점검하고 찻잎 채취와 차(茶) 제조에 관련된 사람들의 기능과 기술을 점검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 벌어지는 각종 민속(民俗)들을 통해 장년 남성과 여성들은 물론 어린 남자애들과 여자애들까지 모두 각자 그해의 차(茶) 제조에 관련된 자신들의 장비와 기술과 기능을 점검하고 미진한 부분을 찻잎 채취와 차(茶) 제조가 시작되는 한식(寒食) 때까지 보완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게 해 줄 기초자료를 확보하는 날이었다. 청명(淸明)에 죽으나 한식(寒食)에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로 하루 이틀 차이밖에 안나는 두 날 중에서 굳이 한식(寒食)으로 기준을 삼은 것은 차(茶) 만드는 일이 얼마나 정교한 작업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우리 민족 5대 명절과 관련된 민속들에 대한 재해석은 이후 계속될 민속과 차 (茶) 편에서 다룬다.
진(辰)이라는 특수 설비는 찻잎을 채취할 차(茶) 나무에 거치(据置)해 놓고 채취한 찻잎을 망태기에 담아 내려오고 다시 올라갈 때 사용하는 수송교(輸送橋)였고 교통교(交通橋)였다. 인공재배되어 키가 볼품없이 작아진 오늘날의 대부분 차(茶) 나무와 달리 인공재배된 차나무는 없고 오로지 자연적으로 생장한 차(茶) 나무만 있던 시절의 차(茶) 나무는 웅장한 모습의 교목(喬木)이었다. 마셔도 수인성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깨끗한 샘물을 만들어 내는 차(茶) 나무는 아무 데서나 자라는 나무가 아니었다. 번개가 많이 치고 비바람이 잦은 곳에서만 자라는 나무였다. 질소(Nitrogen) 때문이었다. 폭풍우 속에서 번개가 칠 때 발생하는 강력한 전기에너지가 역시 강력하게 결합되어 N2 상태로 공기 중에 무진장하게 떠도는 결합질소를 두 개로 분리시키고 두 개의 질소(窒素)로 분리된 그때 폭풍우 속에 내리는 비(H2O)에 있는 수소와 산소에 분리된 질소가 각각 결합해 고질소 비료인 질산암모늄 (NH4NO3) 상태가 되어 폭풍우 속에 비와 함께 부는 바람에 실려 너른 땅에 뿌려질 때 그 땅에서 자라는 게 차(茶) 나무였다. 그렇기에 수없이 많은 메소포타미아 신들 중에 최고의 신(神)은 바로 폭풍우의 신 엔릴(Enlil)이었다. 아시리아인들에게는 바알(Baal)로 아모리인(Amorites)들에게는 마르둨(Marduk)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어도 한결같이 그가 최고의 신(神)으로 숭배된 것은 폭풍우를 관장했기 때문이었다. 즉 차(茶) 나무를 생장하게 하는 신(神)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을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在世理化)의 건국이념을 내려주신 환웅이 하늘에서 세상에 내려올 때 함께 온 신하도 풍백(風伯)과 운사(雲師), 우사(雨師)였다. 뿌려진 것이 고질소비료였기에 모든 식물들이 생장하기 좋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차(茶) 나무를 발견하고 차나무에 다가가 찻잎을 따려면 거의 밀림 같은 빽빽한 초원삼림지역을 뚫고 가야 하는 어려움을 해결해야만 했다. 게다가 더 좋고 더 많은 찻잎을 따기 위해선 이웃한 마을들과의 경쟁도 따돌려야 하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당시의 차(茶) 나무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재배해 키가 작은 관목(灌木)이 아니라 거친 폭풍우 속에서 생장한 거대한 교목(喬木)이었다. 폭풍우가 자주 몰아치는 깊은 골짜기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오래된 수십 미터에 달하는 키와 몇 아름이나 되는 몸통(trunk)을 가진 웅장한 나무가 차(茶) 나무였다. 그런 차(茶) 나무에 올라가 찻잎을 따서 다시 땅으로 내려보내고 그 찻잎들을 모아 마을로 보내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후변화로 차(茶) 나무들이 사라지자 그 골짜기에서 좋다고 판단되는 차(茶) 나무들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점점 마을 간 고을 간 전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진(辰)이라 불린 특수 거치(据置) 시설은 지붕까지 갖춰 그 안에서 숙식할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이 되었다. 지키지 않으면 선점해 놓은 차(茶) 나무를 뺏기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진(辰)은 후일 동채(動寨)로 불렸다. 산중에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설비해 놓은 곳을 산채(山寨)라 했듯 차(茶) 나무에 거치해 놓은 진(辰)은 이동이 가능했기에 동채(動寨)라 불렀다. 한식(寒食)에 찬음식을 먹는 전통은 개자추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한식(寒食) 이후부터 이뤄지는 찻잎 채취 작업의 이런 특수하고도 엄혹한 사정 때문에 생긴 전통이었다. 차(茶) 산업이 엄연하던 시절 우리 민족은 한식(寒食)부터 단오(端午) 때까지는 끼니마다 거의 따뜻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지낼 때가 많았다. 좋은 차(茶) 나무에 진(辰)을 거치(据置)해 그해 단오(端午)까지 찻잎을 채취(採取)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런 좋은 차(茶) 나무를 뺏기지 않으려 저녁이 되어도 마을로 돌아가지 못했다. 전쟁이었다.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와야 할 최소 인원만이 마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단오(端午)에 우리 민족이 그토록 성대하게 잔치를 벌인 연유였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경북 안동(安東)은 좋은 차(茶) 나무들이 많이 있는 유명한 고장이었다. 고려의 태조와 후백제의 견훤이 안동의 옛 이름인 고창(古昌)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여러 번 격돌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동의 차전(車戰)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안동 지역에서 매년 좋은 차(茶) 나무를 놓고 마을끼리 심각한 경쟁이 벌어져 유혈사태까지 발생하자 그 대책으로 나온 것이 차전놀이로 알려진 동채(動寨:진) 싸움이었다. 마을마다 찻잎을 채취하고 싶어 하는 좋은 차(茶) 나무 앞에서는 이미 설치된 동채(動寨)를 지키려는 마을과 자기 마을 동채(動寨)를 새로 설치하려는 마을 사이에 전투(戰鬪)가 벌어지곤 했었다. 피차 아는 처지에 얼굴을 맞대고 주먹다짐하는 것은 서로 피하고 싶어 자연스레 벌어진 싸움은 멀찍이서 불특정 하게 돌을 던지는 석전(石戰)이었다. 투석끈(슬링)을 사용한 석전(石戰)은 살인전이라 금지하고 팔매질로만 이루어진 석전(石戰)이라 해도 돌팔매가 워낙 정확한 터라 반드시 치명적인 유혈사태로 끝이 났다. 결국 후유증이 오래가는 이런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 차전(車戰)이었다. 특정한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채취하고 싶은 마을은 그 해의 그 차(茶) 나무 채취권을 놓고 대보름날 벌어지는 차전(동채싸움)에 반드시 참가해야 했다. 차전(車戰)에 참가하지 않고 차전(車戰)을 통해 그 해 채취권이 결정된 특정 마을의 차(茶) 나무에 대해 무단 채엽을 하는 것은 범죄로 간주되어 형을 받았다. 이제는 재연되지도 않는 안동차전놀이에서 이긴 마을 사람들이 짚신을 하늘로 던지며 개가(凱歌)를 올린 반면 패배한 마을 사람들은 그대로 땅에 주저앉아 탄식하는 장면이 연출된 이유였다. 많은 마을들이 찻잎을 채취하기 원하는 특정 차나무의 찻잎 채취권을 정월대보름날 마을 대항 차전(車戰)을 통해 결정해 줌으로써 찻잎 채취를 두고 발생해 온 심각한 유혈사태를 종식시키려는 대책이었다. 게다가 이런 동채(動寨) 싸움은 자신들의 진(辰:동채)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미리 점검해 보완, 수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석전(石戰)이 그토록 심각한 것은 오랜 차산업(茶產業) 전통에서 다져진 투창(投槍) 실력 때문이었다. 빽빽한 덤불들로 인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좋은 차(茶) 나무에서 찻잎을 채취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썼던 방법이 투창(投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 신(神)들이 반드시 소지하고 있는 지팡이(Was Scepter)의 한쪽 끝이 그리 생긴 건 뱀을 잡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원하는 차(茶) 나무에 던져 나무 몸통에 박히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런 지팡이의 다른 한쪽에는 줄을 매달 수 있는 장치를 달아 주살(弋)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도저히 낼 수 없는 곳에 자리한 차(茶) 나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주살 같이 줄 달린 창(槍)을 던져 목표한 차(茶) 나무에 박히게 하는 투창(投槍) 기술자와 그런 줄 달린 창(槍:Javelin)의 던지기를 통해 생긴 외줄을 타고 차(茶) 나무에 갈 수 있는 외줄 타기 기술자가 필요했다. 줄을 매달고 이루어진 먼거리로의 투창(投槍)으로 차(茶) 나무에 지팡이가 박히면 그걸로 생긴 외줄을 외줄 타기 전문가가 건너갔다. 그때 그 사람의 어깨에는 여러 가닥의 줄이 매어져 있었고 그렇게 건너간 차(茶) 나무에 그가 매고 온 여러 줄들을 차(茶) 나무에 차례대로 묶으면 다음번부터는 많은 사람이 그 줄들을 타고 목표인 차(茶) 나무로 건너갔다. 그 후 그 사람들이 매고 온 줄들로 진(辰:쇠머리)을 설치하는 방법이었다. 이때 진(辰)은 안동의 차전놀이에 사용되는 동채(動寨) 모양이 아니라 영산의 쇠머리로 알려진 모양의 그물망 같은 동채(動寨)가 사용되었다. 빽빽한 덤불 위로 그물망처럼 엮은 그물다리를 놓아 교통교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창녕 영산의 쇠머리는 이런 조건에 있는 차(茶) 나무에 진(辰)을 설치하기 위해 고안된 특수 거치대였다.
이런 투창과 주살, 외줄 타기 방법이 고안되기 전 차(茶) 나무에 길을 내기 위해선 덤불을 뚫고 가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옷이 찢기고 머리카락이 엉켜 차(茶) 나무로 다가가기 어렵게 되자 결국 사람들은 옷을 벗고 머리카락을 빡빡 밀고 알몸으로 덤불을 뚫고 나가 차(茶) 나무에 줄을 걸었다. 그 줄은 영산 쇠머리 같은 진(辰)을 설치하게 해주는 생명줄이었다. 덤불에 찢긴 피부는 피범벅이 되어 결국 흉터로 남았고 그 흉한 상처를 안 보이게 하기 위해 그 위에 색칠을 했다. 문신(文身)이 시작된 연유였고 가이사타이같은 알몸 전사가 나타난 연유였다. 우리 민족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들을 도깨비라고 불렀다. 부정(不正)한 고위 공직자를 제척(除斥)하는 것을 탄핵(彈劾)한다고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홀딱 벗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감투정신을 되새기라는 의미였다. 경남 창녕군 영산(靈山)에서는 찻잎 수송교 역할을 하는 동채(動寨)를 원하는 차(茶) 나무에 거치하는 것을 쇠머리대기라고 불렀는데 안동에서처럼 경쟁하는 마을끼리 대보름날 미리 붙어 승패를 가름함으로써 만일의 불상사를 예방했다. 영산(靈山)의 독특한 동채(動寨)였던 쇠머리는 안동의 동채(動寨)인 차(車)와 그 모양이 달랐다. 안동의 동채인 차(車)가 차(茶) 나무의 몸통(trunk)에 거치하는 것에 치중하는 홑 단(单) 자 모양의 더듬이 구조를 가졌다면 영산(靈山)의 쇠머리는 밭 전(田) 자로 상형(象形)되는 그물망 모양으로 제작된 것이 특징이었다. 안동의 차(車)가 키가 크고 몸통이 굵은 교목(喬木)에 거치할 때 효과적인 반면 영산의 쇠머리는 주변에 덤불들이 빽빽해 차(茶) 나무로 오고 갈 교통로를 만들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차(茶) 나무에 거치할 때 효과적이었다. 영산(靈山) 역시 안동처럼 차(茶) 산지로 유명했던 고장이었는데 고려말 차무역(茶貿易)을 포기하라는 주원장놈의 살인적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사그라들던 공민왕의 국제 차무역(茶貿易) 재건 사업을 다시 일으켜 적극적으로 추동하다 실각했던 신돈의 고향이었다. 그래서인가 영산에서는 행사가 없어진 안동과는 달리 대보름날에서 삼월삼짇날로 날짜만 바꿨을 뿐이지 지금도 창녕군 주최로 영산쇠머리대기놀이를 계속하고 있다. 재정도 빈약하고 주민들도 연로한 악조건 속에서도 조상의 얼을 지켜나간다니 자랑스러운 일이다.
광주의 고싸움놀이 또한 안동과 영산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인데 특이한 것은 고의 생김새였다. 루프(loop)같이 끝부분이 원형인 고는 찻잎을 채취하고 싶은 차(茶) 나무가 밑동부터 가지들이 무성해 안동의 차(車) 같은 구조로 되어있는 동채(動寨)로 거치(据置)했다가는 소중한 차(茶) 나무 가지들이 손상당할 우려가 큰 여건(與件)에 맞춰 고안된 진(辰:동채) 이었다. 우람하고 키가 큰 교목(喬木)으로 가지들이 나무 중간부터 자라기 시작한 안동의 차(茶) 나무들에겐 홑 선(单)자 모양의 더듬이 구조로 되어있는 진(辰)이 동채(動寨)로 맞춤이었다. 그러나 키가 크고 우람한 같은 교목(喬木)이지만 밑동부터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간 광주의 차(茶) 나무들에겐 홑 선(单)자 모양으로 된 동채(動寨)를 거치(据置)했다간 많은 가지들이 부러질 판이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그 가지들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그 위로 덮어 씌우듯 거치(据置)하는 고 모양의 진(辰)이었다. 광주지역에서도 안동과 영산에서처럼 똑같은 이유로 정월대보름날에 고싸움을 통해 그 해의 차(茶) 나무 찻잎 채취권이 결정되었다. 안동의 차와 영산의 쇠머리 그리고 광주의 고는 모두 차(茶) 나무에 거치(据置)해 놓고 찻잎을 채취해 오가는 교통교이자 수송교인 진(辰)이었다. 차(茶) 나무들이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 차(茶) 나무들의 특성에 맞춰 최대한 차(茶) 나무를 손상하지 않고 찻잎을 채취하려는 조상들의 지혜가 만들어 낸 서로 다른 모양의 진(辰)이었다. 이 진(辰)이 농사(農事)란 말을 만들어 낸 농기구였다. 특히 안동의 차전놀이에 등장하는 동채(動寨)는 그 머리 부분의 생긴 모양새가 홑 단(单)자와 흡사해 홑 단(單)자가 안동의 동채(動寨)인 진(辰)을 상형한 글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진(辰)을 제대로 만들어 다른 마을과의 경쟁에서 이기게 하고 그래서 원하는 차(茶) 나무에 진(辰)을 거치(据置)하는 작업까지 지휘하는 사람을 선우(單于)라고 부른 연유였다. 동채(單) 머리에 올라 동채(单)를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는(于) 사람이었기에 선우(單于)라 불린 것이었다. 자신들의 왕을 선우(單于)라고 불렀던 흉노(匈奴)는 돼지와 개에게 탈을 씌워 몽골 고원에서 차(茶) 나무를 탐색했던 사람들로 엄청난 속력으로 내달리는 개돼지들을 따라잡기 위해 마차를 버리고 말등에 직접 올라탄 최초의 인류였다. 선비족의 왕도 선우(單于)라 부른 연유였다. 진두지휘(辰頭指揮)란 말 또한 동채라 불린 진(辰) 머리에 올라 진(辰)의 진퇴와 전환을 지휘한다 해서 생긴 말이었다. 안동은 이런 민족의 역사 그 자체인 차전놀이를 계속해야 한다.
탄핵(彈劾)이란 말은 이처럼 삭발(削髮)까지 하고 온몸이 찢기고 피투성이 되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흉터를 온몸에 새기면서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차(茶) 나무 탐색꾼들의 감투 정신을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한 곳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일하는 고위 감투를 쓴 공직자들이 되새기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