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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Jun 23. 2023

강릉과 영월이 후고구려의 기반이 된 이유

842년부터 시작된 당(唐) 무종(武宗)의 역사상 유례없는 초강도의 폐불정책(廢佛政策)에 의해 촉발(觸發)되고 875년 발발한 황소(黃巢)의 난(亂)에 의해 촉진(促進)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확립(確立)은 목숨을 걸고 실크로드파에 맞서 일본차(日本茶)의 중개무역(仲介貿易)을 지켜 낸 헌안왕(憲安王)과 경문왕(景文王)의 헌신(獻身)과 맞물려 마지막 꿈같은 경제적 번영(繁榮)을 신라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황소(黃巢)의 난이 884년에 진압(鎭壓)되고 난(亂)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주전충(朱全忠)이 해상무역(海上貿易)을 국시(國是)로 내걸었던 6세기의 양(梁) 나라를 계승(繼承) 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의지를 밝히고 도읍도 장안(서안)처럼 서쪽에 치우친 곳이 아니라 낙양보다도 더 동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자 신라에 도피해 와 있던 모든 머천트(Merchant 茶商人)들이 일시에 중국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주전충은 실제로 후량(後粱)이라는 국호(國號)로 서안(西安)이 아닌 변주(卞州:지금의 개봉(開封)에 도읍(都邑)을 정해 중국 역사상 최초로 관중(關中)이 아닌 중원(中原)에 왕조를 열었다.) 차(茶)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머천트(Merchant:차상인)들이 모두 중국으로 돌아가자 일본 찻잎(茶葉)들도 모두 중국으로 선적(船積)되기 시작했다. 황소군(黃巢軍)의 학살을 피해 신라에 들어와 있던 아랍과 페르시아의 머천트(merchant 茶商人)들이 난이 진압되자 모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서안(西安)이 아닌 변주(卞州:개봉)가 차무역(茶貿易)의 중심지가 되자 중국 동해안의 차(茶) 무역기지(貿易基地)들도 단기간에 속속 재건되었다. 통일신라 말기의 번영(繁榮)은 결국 짧은 이야기로 끝나게 되었다. 헌강왕(憲康王) 시절 신라에 사신(使臣)을 보내 황금 300량과 명주(明珠) 10개를 진상(進上)하는 등 갖은 아양을 떨던 일본도 더 이상 찻잎(茶葉)을 신라로 수출하지 않았다. 차(茶) 생산을 하고 싶어도 그 원료가 되는 찻잎(茶葉)을 구할 수 없어 결국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대표되는 신라 차(茶) 산업은 괴멸(壞滅) 상태에 빠졌고 차(茶) 생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기아선상(飢餓線上)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중국역사 최초로 서안과 낙양이 아닌 개봉을 도읍으로 개국한 후량

그러나 동북 방향으로만 흐르는 쓰시마해류(對馬海流)가 대마도 동북쪽을 지나갈 때 갈라져 나온 동한난류(東韓暖流)의 특이한 흐름 덕분에 울릉도(鬱陵島)를 통해 일본 찻잎(茶葉) 수출선(輸出船)들로부터 일정량의 찻잎(茶葉)을 고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강릉(江陵)의 사굴산문(闍崛山門)은 사정이 달랐다. 강릉의 굴산사(崛山寺), 신복사(神福寺)를 중심으로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동해(東海)의 삼화사(三和寺), 울진(蔚珍)의 불영사(佛影寺)등 동해 연안(沿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포구(浦口)마다 자장(慈藏)과 의상(義湘) 대사가 건립한 사찰들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흘러 들어온 일본 찻잎(茶葉) 무역선에서 찻잎을 확실히 거둬들여 증차(蒸茶)를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사굴산문(闍崛山門)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의 희생으로 건립된 평창(平昌)의 월정사(月精寺)와 상원사(上院寺), 수다사(水多寺), 정선(旌善)의 정암사(淨巖寺)와 영월(寧越)의 흥녕사(興寧寺)를 기본으로 하여 의상대사(義湘大師)의 헌신(獻身)으로 추가된 홍천(洪川)의 홍양사(洪陽寺), 원주(原州)의 구룡사(九龍寺), 단양(丹陽)의 비마라사(毘摩羅寺)등 신라 차산업(茶産業) 보존 노력이 알알이 점철(點綴)된 사찰(寺刹)들로 이루어진 사자산문(獅子山門)이 사굴산문(闍崛山門)에서 만든 차(茶)를 성주산문(聖住山門)이 있는 보령(保寧)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게다가 사굴산문(闍崛山門)과 사자산문(獅子山門)이 터 잡은 지역은 원성왕(元聖王) 즉위 이후로 김헌창(金憲昌)의 난(亂)까지 겪으며 내물왕계(奈勿王系)의 신라 왕실(王室)과 확실한 선긋기를 택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손자 김주원(金周元)의 후손들이 호족(豪族)으로 지배하는 지역이어서 사굴산문(闍崛山門)과 사자산문(獅子山門)은 그들의 강력한 보호와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출처 국립해양조사원

일본 찻잎(茶葉)을 쉽게 수입할 수 있었던 남해(南海) 연안(沿岸)에 자리 잡은 다른 산문(山門)들이 황소의 난이 진압된 후 갑자기 일본 찻잎(茶葉)이 들어오지 않아 존립(存立)의 생사(生死)를 다툴 때 사굴산문(闍崛山門)은 자신들이 일본 찻잎으로 만든 차(茶)들을 한강(漢江) 수로(水路)로 운반하는 역할(役割)을 담당했던 영월(寧越)의 흥녕사(興寧寺)를 중심으로 한 사자산문(獅子山門)과 함께 상대적인 최고의 번영을 구가(謳歌)했다. 동해안 연안(沿岸) 포구(浦口)들에서는 대마난류(對馬暖流)에서 갈라져 동해상에서 와류(渦流)를 일으키는 동한난류(東韓暖流)로 인해 표류(漂流)하게 된 울릉도(鬱陵島) 경유(經由) 발해행(渤海行) 일본 찻잎(日本茶葉) 무역선(貿易船)들에게서 나오는 찻잎들이 일정량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강릉(江陵)의 사굴산문(闍崛山門)과 영월(寧越)의 사자산문(獅子山門)은 울릉도를 경유하는 일본 찻잎(日本茶葉) 무역선(貿易船)에서 유출된 찻잎(茶葉)들로 오히려 신라 내 어느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일본산 찻잎들을 확보함으로써 당(唐) 태종(太宗)과 고종(高宗)의 연이은 신라(新羅) 차산업(茶産業) 압살정책 속에서 자장율사(慈藏律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의 눈물겨운 희생(犧牲)으로 그 명맥(命脈)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차(茶) 생산기지(生産基地)로서의 산업적(産業的) 위치(位置)를 회복하며 상대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수출기지(輸出基地) 역할만을 수행했던 보령(保寧)의 성주산문(聖住山門) 또한 그랬기에 명맥은 이어가고 있었다. 궁예(弓裔)가 원주(原州)와 강릉(江陵)을 기반(基盤)으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울 수 있었던 연유(緣由)가 여기에 있었다.  

사굴산문과 사자산문 내륙 횡단 교역로

 궁예(弓裔)가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지금의 강원도와 충청지역에 구축된 일본 찻잎(茶葉) 수입가공 무역(貿易) 조직망 운영에 따른 경제력 때문이었다. 이 같은 경제력(經濟力)은 강릉(江陵)을 위시해 속초(束草), 양양(襄陽), 동해(東海), 삼척(三陟) 울진(蔚珍), 영덕(盈德) 등의 동해안(東海岸) 포구(浦口)들을 통해 들어온 일본 찻잎(茶葉)들을 사굴산문(闍崛山門)에 속한 사찰들에서 가공해 무쇠솥을 이용한 전차(煎茶)로 생산해 내고 이를 영월(寧越)을 중심으로 원주(原州)와 충청 진천(鎭川)과 공주(公州) 그리고 보령(保寧), 서천(舒川)까지 연결된 사자산문(獅子山門) 소속 사찰들을 통해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강력한 차(茶) 무역망(貿易網)이 지금의 강원(江原) 영서(嶺西) 지역과 충청(忠淸) 지역에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茶) 무역망(貿易網)이 강원(江原)과 충청(忠淸) 지역에 형성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자장율사(慈藏律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연이은 헌신적(獻身的) 노력 덕분이었다.

내륙 무역로에 있어서 세달사의 전략적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궁예 자신이 사자산문(獅子山門)의 본사(本寺)인 흥녕사(興寧寺:지금의 法興寺)가 있는 영월(寧越)의 세달사(世達寺:후일 興敎寺)에서 전차(煎茶) 가공기술자로 10살부터 일해 온 사람이었기에 차(茶) 무역과 차(茶) 무역로(貿易路)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월이라는 지역은 당 태종에 의해 압살 당해야 했던 신라의 차(茶) 산업을 보존하고자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마다하지 않고 차령(車嶺)이라는 새로운 동서(東西) 횡단(橫斷) 차무역로(茶貿易路)를 만들었던 자장율사(慈藏律師)의 대계(大計)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었다. 자장대사가 영월에 있는 사자산(獅子山)에 흥녕사(興寧寺: 지금의 법흥사)를 창건해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한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게다가 궁예가 출가한 세달사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문무대왕의 청(請)으로 차무역(茶貿易)을 통해 나당전쟁(羅唐戰爭) 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찰이었는데 그것은 삼국유사 제3권 탑상 편(塔像編)에 나오는 “낙산(洛山)의 두 성인(聖人) 관음(觀音)과 정취(正趣) 그리고 조신(調信)”조(條)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달사에 소속된 영월 소재 장원(莊園)을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에서 파견(派遣)한 조신(調信) 스님이 관리(管理)하고 있음을 보여준 이 기록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낙산사와 영월에 있는 세달사가 함께 동일한 주체에 의해 운영되는 사찰들이란 걸 증거(證據) 해 주는 것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척하고 의상대사가 완성한 차령(車嶺 실상은 茶嶺)이라는 동서 횡단 무역로에서 단양(丹陽)과 함께 바퀴 중심축(中心軸)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영월(寧越)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했던 궁예(弓裔)였기에 정세(情勢)를 빠르게 판단(判斷)하는 실력(實力)을 함양(涵養)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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