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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Oct 15. 2023

순천이 후백제의 기반이 된 이유

견훤(甄萱)이 군인으로 자신의 존재를 우뚝 세운 것은 섬진강 무역로를 지키는 수군(水軍)으로 사천(泗川)에서 복무할 때부터였다. 남해안을 관통하는 쿠루시오 해류의 영향으로 대륙에 수출되는 일본 찻잎들은 옛날부터 섬진강(蟾津江)에 올려져 금강(錦江)과 옥천(沃川)의 보청천(報靑川) 그리고 보은(報恩)의 달천(達川)을 통해 남한강으로 연결되어 임진강(臨津江)을 통해 대방(帶方)과 낙랑(樂浪)으로 전달되었다. 한반도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모두 다섯 개인데 모두 옛날부터 찻잎을 나르는 중요한 수로로 사용되었다. 섬진강과 낙동강(옛 이름은 黃山津), 예성강과 임진강, 대동강(大同江)이 그 강들인데 이들은 금강과 남한강, 그리고 대동강 지류인 남강(南江)에 의해 모두 서로 연결될 수 있었기에 한반도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찻잎의 대륙 수출로로 언제나 경제적 풍요가 넘치는 땅이었다. 

달천에 의해 남한강과 연결되는 섬진강과 금강

 이들 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일본 찻잎을 실은 무역선이 제일 처음 들어오는 섬진강(蟾津江)이었고 그래서 섬진강은 임진강(臨津江)과 함께 강 자체가 나루터 역할을 한다 해서 강 이름에 진(津) 자가 들어가 있었다. 그런 섬진강에 무역선이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곳이 고성(固城) 반도 서쪽 끝 각산(角山)이었다. 섬진강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백제 무왕은 이곳에 산성(山城)을 쌓았는데 견훤이 무장(武將)으로 명성을 떨친 곳도 바로 여기였다. 대륙으로 수출되는 일본 찻잎들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니 찻잎을 실은 무역선을 노린 해적들이 창궐했고 견훤은 이들의 소탕에 큰 능력을 발휘했다. 자연히 견훤은 수군(水軍)의 실질적인 대장이 되어 있었다.         

견훤이 복무한  남해 수군(水軍)은 섬진강 무역로 외에도 또 하나의 중요한 작전 수역(水域)이 있었는데 그것은 거문도(巨文島)와 벌교(筏橋)가 이어지는 바다였다. 경문왕때부터 활성화된 거문도와 벌교 수역(水域)은 섬진강이 보성강(寶城江)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무역로였다. 송광사(松廣寺)가 창건되기 전 이미 경문왕 1년인 861년에 도선 선사에 의해 조계산에 선운사(禪雲寺)가 창건된 것은 거문도와 벌교로 이어진 이른바 승평무역로(昇平貿易路)로 들어오는 찻잎들을 차(茶)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흥덕왕(興德王) 때 일본 찻잎(茶葉)을 다시 중계무역(中繼貿易) 해주는 대가(代價)로 당(唐) 문종(文宗)으로부터 김대렴(金大廉)이 받아온 차나무(梌) 종자(種子)를 식재(植栽)한 지리산(智異山) 일대에서 꾸준히 일정량 이상의 찻잎들을 생산해 내고 있었고 옛날부터 확립된 섬진강 무역로에 경문왕(景文王) 때부터 시작한 승평(昇平:순천 順天) 해상무역로(海上貿易路)로도 적지 않은 찻잎들이 수입되는 곳이 견훤이 맡고 있던 남해 수역이었다. 지리산(智異山)을 배후(背後)에 두고 섬진강 무역로와 보성강으로 연결되어 있는 승평무역로(昇平貿易路)를 가지고 있던 이 지역에 장흥(長興)의 가지산문(迦智山門)과 곡성(谷城)의 동리산문(桐裡山門), 남원(南原)의 실상산문(實相山門)등 구산선문 중 세 개의 산문이 몰려 있는 것은 당연했다. 이 지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찻잎부족으로 차생산(茶生産)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견훤(甄萱)이 승평(昇平:순천)을 기반으로 후백제(後百濟)를 창건할 수 있었던 연유였다.

장보고가 암살된 이후 통일신라 왕실과 경주(慶州) 귀족들의 통치자금은 합포(合浦: 지금의 창원)의 봉림산문(鳳林山門)을 통해 수입된 일본산 찻잎들을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에서 가공한 후 왕실과 경주귀족들이 직접 관할하는 사찰(寺刹)들을 통해 보령(保寧)으로 보낸 후 원산도(元山島), 삽시도(揷矢島), 외연도(外煙島)등이 차례로 연결된 도연항로(島連航路)를 통해 중국 산동(山東) 반도의 청도(靑島:칭다오)로 수출하는 차무역(茶貿易)에서 만들어졌었다. 양산 통도사(通度寺)에서 가공된 차(茶)들은 낙동강(洛東江)을 따라 신돈(辛旽)으로 유명한 창녕(昌寧) 화왕산(火旺山)의 옥령사(玉靈寺 혹은 옥천사(玉泉寺)와 청도(靑道) 화악산(華岳山)의 적천사(磧川寺)를 거쳐 달성(達城) 비슬산(毗瑟山)의 용천사(湧泉寺 혹은 옥천사(玉泉寺)로 옮겨졌고 구미에서 곡천을 통해  김천(金泉)의 직지사(直指寺)로 가거나 상주(上州)의 황령사(黃嶺寺)와 보은을 통해 청주(淸州)의 흥덕사(興德寺)들을 선택적으로 거쳐 보령(保寧) 성주산문(聖住山門)으로 최종 운반되어 그곳에서 대륙으로 수출되었다. 청주(淸州)에서 가깝고 이미 무역항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완비한 당항성(党項城:화성)과 당진(唐津)으로 무역로(貿易路)가 연결되지 않은 것은 당항성과 당진이 실크로드 상방이 직접 통제하는 권역(圈域)으로서 신라 왕실조차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국제자유무역항이었기 때문이었다. 덕물도(德勿島:지금의 덕적도)의 동쪽 해안 지역은 당(唐) 황실(皇室)의 지원을 받는 실크로드 상방(商幇)들의 전용(專用) 차무역항(茶貿易港)으로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황소의 난이 진압된 후 일본 찻잎들이 모두 당나라로만 수출되어 발생한 찻잎부족사태로 존립이 위태로워진 구산선문(九山禪門)은 고려 태조 때 형성된 해주(海州) 수미산문(須彌山門)과 법상종단(法相宗團)의 중심사찰 중 하나인 보은(報恩)의 법주사(法住寺)에 의해 개창 초기에 진즉 파괴된 문경(聞慶)의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제외하면 오직 신라 왕실과 경주 귀족들이 직접 관장(管掌)해 통치자금을 만들어 오던 창원(昌原)의 봉림산문(鳳林山門)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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