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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Oct 02. 2023

천사옥대의 진실 2

개로왕 죽음의 진실 

 제대로 된 수출항이 없어 쿠다라가 떠나버린 백제는 양견(楊堅)이 알던 나라가 아니었다. 무왕(武王)이 익산에 차(茶)를 제대로 만들어 낼 미륵사 건립을 결심하게 된 연유였다. 사위인 북주(北周) 선제(宣帝)에게 모든 정무(政務)를 일임받은 양견(楊堅)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신라의 진평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진평왕은 백제 개로왕(蓋鹵王)을 비명(悲鳴)에 가게 한 전철(前轍)이 아예 재발(再發)할 수 없도록 하는 확실한 안전 보장을 요구했다. 후일 금패신부(金牌信符)로 발전하는 증표(證票)가 옥대(玉帶)로 만들어져 비밀리에 파견된 사신(使臣)을 통해 진평왕에게 즉시 전달되었다. 진평왕은 만족했다. 교외에서 행해져 일반 백성들도 참관하는 국가적 행사 때나 종묘에서 거행되어 귀족과 대소 신료 모두가 참석하는 제례에 진평왕은 반드시 이 옥대(玉帶)를 차고 나와 신라의 국가 재정(財政)이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유지될 것임을 과시했다. 사람들은 금으로 새겨지고 옥으로 장식된 옥대(玉帶)에 여전히 대구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을 보며 나라의 미래에 안도했다. 안도(安堵)는 그대로 안정(安定)으로 이어졌다. 진평왕이 무릇 교묘(郊廟)와 대사(大祀)에는 항상 이것(옥대)을 허리에 찼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남겨진 연유였다.      

옥대 판형에 매다는 대구

 뇌천(雷川) 김부식이 남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절제(節齋) 김종서가 남긴 고려사(高麗史)의 천사옥대에 관한 기록에서 가장 큰 차이는 옥대(玉帶)의 모양(模樣)을 묘사한 기록의 유무(有無)였다. 김부식은 옥대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종서는 옥대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인종의 당시 고려와 진평왕의 당시 신라는 흡사(恰似)했다. 진평왕의 당시 신라와 세종의 당시 조선은 유사(類似)했다. 아버지 김근(金覲)이 소동파로 잘 알려진 소식(蘇軾)과 그의 동생 소철(蘇轍) 형제를 너무나 흠모해 자신의 아들들에게 각각 식(軾)과 철(轍)을 붙여 이름이 부식이 된 김부식(金富軾)은 남송(南宋)의 지원을 받은 무신(武臣)들에게 그의 아들들이 목과 사지가 절단된 채 저잣거리에 매달릴 때 부관참시당했다. 김종서가 기록한 고려사엔 진평왕의 옥대가 금을 상감(象嵌)하고 옥(玉)을 넣은 네모진 허리띠인데 길이가 10발(圍)이고 대구(帶鉤)가 62개인 모양이었다고 정확히 밝혀져 있었다. 대구(帶鉤)가 달린 네모난 판형에는 하늘에서 정한 계시가 쓰여 있었다고도 했다.

네모난 판형들을 연결해 만든 옥대의 모습 - 천사옥대는 이런 판형이 62개, 옥으로 만든 대구도 62개가 달려 있었다

 의복(衣服)을 결속(結束)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허리띠에 부착된 갈고리 모양 부품을 대구(帶鉤)라고 하는데 그게 62개나 달려 있는 옥대였다. 1년에 한 개씩의 대구(帶鉤)를 쓴다고 할 때 최대 62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대구(帶鉤)였다. 이 대구(帶鉤)들은 수(隋)나라 문제가 북주(北周)의 전권대신 수국공(隋國公)이었을 때 마린로드 상방과 실크로드 상방 대표들의 인장(印章)과 자신의 인장이 함께 찍힌 네모난 판형(版形)에 걸도록 고안되었는데 이 네모난 판형 62개가 연결되어 제작된 것이 진평왕의 천상옥대였다. 그러니 처음엔 당연히 보통 사람은 감히 찰 수도 없는 엄청 긴 옥대였다. 그러나 인장들이 찍힌 네모난 판형과 거기 걸린 대구(帶鉤)가 한 해의 차(茶) 무역을 허가하는 금패신표(金牌信標)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어 해가 갈수록 네모난 판형이 없어지면서 옥대는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허리에 두를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짧아졌다. 언제부턴가 신라왕이 직접 착용하지 않고 비공개인 채로 창고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남은 연유였다. 진평왕이 그토록 자랑했던 천사옥대의 실체는 차(茶) 무역특허장(Charter of Merchant)이었다. 더더군다나 옥대를 구성하는 그 네모난 판형들엔 고구려왕의 인장(印章)까지도 들어 있었다.

보부상 인장들

 446년 북위(北魏) 태무제의 폐불조치로 발생한 엄청난 피해는 574년 북주(北周) 무제의 폐불 조치로 생긴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도움(?) 때문이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백제에서 생산된 차(茶) 뿐 아니라 백제를 경유하는 모든 차(茶)를 오직 북위로만 수출해 주었기 때문에 수습될 수 있었던 위기였다. 그런데 이를 통해 백제의 번영과 발전이 괄목상대(刮目相對) 한 것으로 확인되자 북위의 풍태후(馮太后)는 발해만(渤海灣)의 제해권(制海權)을 바탕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북연(北燕)의 풍홍(馮弘)을 제거할 때 태무제(太武帝)와 고구려 장수왕이 436년 했던 것과 같은 거래를 장수왕에게 다시 제시하여 장수왕은 백제를 침공했다. 고구려는 백제가 북위와의 고수익(高收益) 차교역(茶交易)을 통해 확보해 놓은 엄청난 국부(國富)를 강탈했고 북위는 개로왕이 죽음으로써 폐불 폐해를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맺었던 불평등 차(茶) 무역 조약을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개로왕이 사로잡혀 참수(斬首)까지 되었던 연유였다. 개로왕이 그때 위례성에서 전투중인 고구려군에게 사로잡힌 건 고구려 첩자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북위의 사신에게 속은 거였다. 진평왕은 이런 개로왕(蓋鹵王)의 비극을 정확하게 적시(摘示)하며 고구려에 의한 차도살인(借刀殺人)까지 방지하는 대책을 요구했다. 결국 고려 평원왕(平原王)의 인장(印章)까지 들어간 판형 62개가 만들어졌다. 

북위와 초원로 유통을 담당한 고막해 둘 모두와 국경을 접하면서      발해만으로 들어오는 차(茶)를 중개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누린 북연

 인장들이 찍힌 판형(版形)과 거기에 달린 대구(帶鉤)를 소지한 사람의 차(茶)는 모든 선비족(鮮卑族)과 마린로드 상방, 실크로드 상방과 고구려 모두의 보호를 받으며 정상적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을 그들로부터 모두 보장받는다는 금패신표(金牌信標)였다. 최장 62년간 신라의 차(茶) 무역을 보장하는 이 천사옥대를 제작해 신라에 넘겨준 후 외손자에게 양위받아 황제가 된 양견(楊堅)은 북주의 황제 가문이었던 우문(宇文)씨 일족을 모두 죽였다고 사서에 기록된 연유였다. 아무 걱정이 없게 된 진평왕이 재위 초 매일 매(鷹)와 사냥개를 끌고 사냥하며 노는 걸 무척 즐겼다는 기록이 남은 연유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명나라때 차마사茶馬司에서 사용된 금패신부(金牌信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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