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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Oct 02. 2023

천사옥대의 진실 1

간다라와 삭발의 뜻은

천년의 역사였다. 그 역사는 박혁거세가 시루와 체(篩)를 사용해 찻잎을 우려내는 것이 아니라 쪄내는 증차(蒸茶)로 만들어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한 역사였고 그의 손자 유리가 찻잎(茶葉)을 찔 때 사용하는 체의 금을 더욱 가늘게 만들어 더욱 정교한 증차를 만들어 내게 한 역사였고 석탈해가 차(茶) 만드는 과정에 숯을 도입하는 혁명을 일으킨 역사였다. 석굴암에서 확인할 수 있듯 신라인들은 결국 찻잎에 가장 안 좋은 고온(高溫)과 다습(多濕)을 돌과 흙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과학을 발전시켰고 불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신라인들은 찻잎을 차로 만드는 시설을 고인돌에서 누각(樓閣)과 회랑(回廊)으로 변화시킨 역사였다. 대륙과 가장 멀리 떨어진 불리함 속에서 불굴의 용기와 혁신으로 세계 차(茶) 산업을 선도하는 대체 불가능한 나라를 만든 역사였다. 그랬던 그 나라가 그 역사가 이제 해적의 역사가 되어 너덜거리고 있었다. 600년을 버텨 지켜온 역사가 선덕여왕이 죽고 250년도 안되어 망하고 있었다. 찻잎을 소금 만드는 방법처럼 뜨거운 물로 우려만 내던 추장(酋長)의 시대에서 시루와 가는 금의 체를 사용해 찻잎을 찌는, 증차로 만들어 수출까지 하는 이사금(尼師今)의 시대로 바꾼 신라인들이었다. 찻잎을 나무 기둥에 매달아 건조시키는 칸(干)의 시대를 고인돌을 응용해 석빙고를 만들어 건조시키고 보관하는 마립간(麻立干)의 시대로 만든 그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을 해적으로까지 몰아 간 건 아니 그들이 해적으로까지 전락한 건 생존 전략이라며 외부의 압력에 너무 쉽게 자주 바꾼 차(茶) 산업정책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후변화로 인해 더 이상 차(茶) 나무가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체 찻잎 생산량이 줏대를 가지기엔 중국과 일본에 비해 너무나도 빈약했다.              

 

 진평왕(眞平王)이 천사옥대(天賜玉帶)를 가지게 된 건 행운이었다. 담을 넘다 요절한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태자의 동생이었던 진지왕(眞智王)은 전대미문의 불운에 시달리다 부왕(父王) 진흥왕(眞興王)이 승하한 지 3년 만에 역시 훙(薨)했다. 420년대부터 갑자기 추워진 기후 한냉화(寒冷化)로 고구려가 수도를 남쪽인 평양으로 천도하고 대륙(大陸)도 장강(長江)을 경계로 남북으로, 태행산맥을 경계로 동서로 분열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기후 변화로 인한 혼란이었기에 차(茶)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커졌고 커진 만큼 차(茶)를 만드는 사찰(寺刹)과 승려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차(茶)를 나약하고 썩어빠진 한족(漢族)들이나 마시는 음료라 평가절하하며 마유주(馬乳酒)를 최고로 평가하던 선비족(鮮卑族)들에게 늘어나는 사찰과 승려는 차(茶)의 우수성을 증명하여 한족(漢族)을 높이는 불온(不穩)이었다. 역시 선비족의 나라였던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는 승려들을 그들의 가족과 함께 모두 죽여버렸다. 물론 재산도 몰수했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아비가 아들을 잡아먹는, 납치 강간과 혼인 빙자 간음이 판치는 이야기들을 신화로 내세우는 지역에서 건너온 종자(種子) 답게 잔인했고 과격했고 무도(無道)했다. 기후가 급작스럽게 추워지면서 초원로 북변(北邊)에 살던 모든 부족들이 북위(北魏)를 향해 남하했고 그들의 남하(南下)를 멈추게 해 줄 차(茶)는 점점 비싸졌다. 치솟는 가격(價格)에 분노한 태무제가 차(茶) 산업에 관계된 모든 이들에 대한 처벌을 감행한 것이 첫 번째 폐불(廢佛)이 일어난 이유였다. 정해준 가격으로 정해준 물량만큼 팔지 않는 차업계(茶業界)에 권력의 철퇴(鐵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태무제는 그 가족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모두가 간절히 원하는 차(茶)를 만드는 사람들을 죄다 죽여버렸으니 차(茶)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차(茶)를 달라며 소요를 일으켰고 당연히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북위 황실은 모두에게 정해진 기준에 의해 토지를 일률적으로 나눠주는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밀리게 되었다. 결국 태무제는 독살당했다.      

판형 옥대의 모습    출처:정기룡 장군 옥대

 북위(北魏)로서는 나라가 망하는 꼴을 앉아서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윈강석불(雲崗石窟)이라는 세계문화유산은 북위 황실이 지은 호국사찰(寺刹)이었다. 자신들이 돌을 잘 다루는 족속들이란 것만 알게 한 채 남아 있는 돌덩어리들은 실제로 사찰(寺刹)이 차(茶)를 제조하는 시설들로 채워진 공장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북위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다. 그러나 제발 차(茶)를 다시 만들어 공급해 달라는 그들의 뜻은 충분히 전달된 역사(役事)였다. 결국 태무제가 야기(惹起)한 차(茶) 공급망 파괴는 개로왕(蓋鹵王)의 백제에 의해 수습될 수 있었다. 북위를 뒤이어 탄생한 선비족(鮮卑族) 나라들인 서위(西魏), 북주(北周) 때에는 승려가 삼백여만을 헤아렸고 사찰은 4만여 곳에 달했다. 차(茶)에 대한 수요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는 증거였다. 기후 변화에 따른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정말 가장 필요한 항생제(抗生劑)가 없던 시절, 찻잎(茶葉)을 넣고 끓인 물(水)은 말 그대로 수인성(水因性) 질병을 방지하는 오늘날의 항생제 역할을 해주었다. 수(隋) 문제(文帝)가 고질(痼疾)이 되어버려 자신을 평생 괴롭혔던 두통을 마유주(馬乳酒)가 아닌 차(茶)를 음용(飮用)함으로써 물리쳤다는 기록은 당시 차(茶)가 가졌던 효능이 어떠했던 것인가를 알게 해주는 증거다.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자신의 형들을 차례로 황제로 올려 허수아비로 만든 후 권력을 전횡하던 사촌형 우문호(宇文護)를 제거한 후 574년 삼무일종의 폐불(廢佛)중 두 번째 불교 탄압을 실행했다.  

천사옥대를 알린 삼국유사

 영어로 price라고 하는, 물건값을 가리키는 가격(價格)이라는 말은 원래 차(茶)의 등급을 뜻하는 말이었다. 차(茶)를 가(檟)라고 또는 다라고 발음했던 사람들은 간다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산스크리트어로 ghandara라고 쓰는데 이중 gha(가:檟)는 cha(차:茶)를 말하는 것으로 풀(草) 모습으로 자라는 차(茶)를 나타내는 말이고 da(다)는 나중에 푸젠 성(福建省) 사람들이 테(te)라고 발음한 원조(元祖)인데 나무(木) 모습으로 자라는 차(茶)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ra(라:羅)는 gha와 da가 자라는 땅(tan:域)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gha와 da 사이의 n은 영어로 and라는 그리고(와)라는 뜻인데 배달족(倍達族)이 원래 살던 아프리카 동북부에 있는 달의 산(현지어로 루왜은조리(Mt. Ruwenzori)를 조어(造語)할 때 쓰던 그리고(와)에서 나온 어법이었다. 루왜은조리 산(山)은 루왜 그리고(와) 조리의 산이란 뜻이다. 루(lu), 왜, 조, 리(li). 네 부족이 살던 산이란 뜻이다.            

글자 차 茶 의 변화 역사

 북위 시절 태무제처럼 승려와 그 가족들을 모두 죽이진 않았으나 북주의 무제는 삼백만 명에 달하는 승려를 환속시켜 군인과 일반 백성으로 만들었고 4만여 곳의 사찰을 재산 몰수 후 귀족과 관리들에게 불하했다. 이를 통해 새로 확보한 군인과 재정을 북제(北齊) 공격에 쏟아부어 577년 북제를 멸망시키고 장강(長江) 이북 지역을 통일했다. 당연히 무제(武帝)는 북제 지역에 있는 사찰과 승려에 대해서도 폐불 조치를 단행했다. 북주(北周)에서와 똑같이 2백만 명에 달하는 승려가 환속당했고 4만여 개의 사찰이 재산 몰수되고 폐쇄된 후 불하되었다. 578년 무제가 죽을 때까지 4년간 계속된 이 폐불(廢佛) 조치로 전 세계 차(茶) 공급망은 엉망이 되었다. 김춘추의 조부(祖父) 진지왕은 무제(武帝)가 장강 이북 지역에 소재한, 북주와 북제의 영토 내에 있는 모든 불교 사원들을 철폐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킨 폐불 정책이 진행되던 574년에서 578년 사이, 불행하게도 일본 차(茶)를 중계 무역해 살아가는 신라의 왕이었다. 북주의 무제가 죽고 후일 수문제(隋文帝)가 되는 북주(北周) 수국공(隨國公) 양견은 큰사위인 선제(宣帝)가 즉위한 후 부랴부랴 차(茶)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떨어야 했다. 북주 무제의 터무니없는 폐불 조치로 차(茶) 공급망이 교란(攪亂)되면서 신라에서는 생산한 차(茶)를 팔지 못해 극심한 불황이 닥쳤고 그로 인해 발생한 재정압박과 경기 침체로 노심초사하던 진지왕은 왕노릇 3년 만에 죽었다. 황음(荒淫)을 일삼다 죽은 진지왕(眞智王)이 아니었다. 진지왕의 손자(孫子)인 김춘추가 차(茶) 산업을 포기하겠다 나서도 그의 우국충정이 의심받지 않았던 건 조부(祖父)의 희생이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 젖을 발효시켜 약한 도수의 술이 되는 마유주를 우리가 남이가 하며 마시는 건 이제 일부 선비족들 뿐이었다. 이미 대다수 선비족들도 다른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건강을 지켜주고 도와주는 차(茶)를 마실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탁현(涿縣)의 돗자리 장수 유비(劉備)가 차(茶) 한잔 마시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노모(老母)를 위해 강남(江南)에서 올라오는 상선을 기다려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주고 차(茶)를 구매하려 하지만 턱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다시 재연된 거였다. 이제 무도한 선비족들의 만행으로 가격(價格)이 폭등(暴騰)한 차(茶)를 사람들에게 공급해 줄 수 있는 곳은 신라뿐이었다.   

범어사 전경    산속에 건물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절(寺)이 사성어(四聲語)로 스(si)라고 발음되기에 스님은 단순히 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만 승려(僧侶)라고 부를 때는 찻잎을 찌는 기술과 쪄서 고온(高溫) 다습(多濕)해진 찻잎(茶葉)을 처음엔 식히고(飡) 다음엔 건조(乾燥)시키는 기술을 가지고 사찰에 거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승(僧)이란 시루(曾)를 이용해 찻잎(茶葉)을 찌는(蒸) 기술자를 의미했고 여(侶)란 찌어진 찻잎을 신속(迅速)하게 냉각(冷却)하고 건조(乾燥)하는 기술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고온과 다습은 찻잎을 산화(酸化)시키는 주범들이었기에 찻잎을 시루에 찐 이후에는 그 어떤 지체(遲滯)도 없이 빻고 식히고 긴압(緊壓)하고 또 식히고 건조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은 기계가 해 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사람이라고 또 누구나 다 해낼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북주 무제는 찻잎(茶葉) 가공을 통해 항생제(抗生劑) 역할을 하는 차(茶)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4년씩이나 군인과 농부로 살게 함으로써 그들을 단순 노동자로 전락시켜 놓았다. 금기(禁忌)된 오신채(五辛菜) 같은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온갖 냄새로 뒤덮인 저잣거리에서의 4년간의 생활은 승려들의 오감(五感)을 망쳐 놓았다. 군인으로 끌려간 승려들은 코밑에 배어버린 피비린내를 끝내 지우지 못했다. 차(茶)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질병으로 쓰러져 갔고 제대로 만들어져 항생제 역할을 하는 차(茶)는 야단법석만큼 시장에 공급되지 않았다. 한번 찢어진 그물은 쉬이 꿰매지지 않았다. 백성들이 수인성(水因性) 질병(疾病)으로 쓰러져 가자 수국공(隨國公) 양견(楊堅)은 다급해졌다. 제대로 된 차(茶)를 속히 보급하지 않는다면 곧 전염병이 창궐해 누구도 손쓸 수 없는 상황이 올 거라는 걸 수주자사(隨州刺史)를 지낸 유능한 행정가였던 양견은 알 수 있었다. 항생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차를 생산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보유한 곳에 구조 요청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스님들에겐 육식(肉食)이나 오신채(五辛菜)를 금하는 법(法)이 없었으나 승려(僧侶)에게는 엄격히 금(禁)하는 것이 계율이었다. 특히나 오신채는 채소(菜蔬) 임에도 승려들에게 금(禁)했던 이유는 그들의 강력한 향(香) 때문이었다. 고유한 차향(茶香)을 내게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차가공(차加工) 과정이고 냄새로 빛깔로 공정의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고기 굽는 냄새와 연기는 차향(茶香)을 망치고 색깔을 착시케 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또 마늘, 달래, 파, 부추, 무릇 같은 것들은 채소라 하더라도 그 자체의 향이 엄청 강해서 이 역시 찻잎에 스며들어 고유한 차향(茶香)을 없애기에 엄금(嚴禁)하는 채소가 되었다. 육식 그리고 오신채(五辛菜)가 사원(寺院)에서 금기(禁忌)하는 대상이 된 진짜 이유는 그걸 먹은 승려들이 찻잎향(茶葉香)을 제대로 감별(鑑別)할 후각을 잃어버려 최상의 차(茶)를 만드는데 실패하기 때문이었다. 이 금기가 생긴 게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낙양(洛陽)의 백마사(白馬寺)로 들어온 이후라고 하는 연유(緣由)다. 승려(僧侶)가 아닌 스님들도 승려처럼 반드시 해야 하는 삭발(削髮)은 찻잎을 찌고(蒸) 빻고(�) 건조(乾燥)하는 일을 하는 중에 섞여 들어갈지도 모를 모발(毛髮)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찻잎을 다루는 사찰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삭발을 해야 했던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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