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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맥파인더 Oct 16. 2023

신라왕이 해적왕이 된 이유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조직적 보복 테러를 피하기 위해 신라 왕실(王室)은 경주의 중앙귀족(中央貴族)들과는 거리가 먼 육두품(六頭品) 이하의 지방관(地方官) 출신 호족(豪族)들을 내세워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지원육성(支援育成) 해 왔었다. 황소의 난으로 구산선문뿐 아니라 온 나라가 빛나는 번영을 이룩했지만 그 결과는 그러나 신라 왕실과 경주 중앙귀족들이 아닌 6두품 지방 호족(豪族)들의 경제력과 세력이 크게 신장(伸張)된 것으로 끝이 났다. 황소의 난이 진압되고 더 이상 싼값으로 일본 찻잎(茶葉)들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대규모 실업사태(失業事態)가 야기(惹起)되었고 이에 대해 왕실과 귀족들로 구성된 조정(朝庭)이 대책(對策)을 내놓지 못하자 곧 무정부(無政府) 상태가 초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정부 상태는 왕실과 조정에서 볼 때 그런 것이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는 지방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차(茶)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찻잎들을 자체적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명주(溟州)와 삭주(朔州)는 동해안에 일정하게 표류해 들어오는 일본 찻잎 무역선들로부터 차(茶)를 만들 찻잎을 확보하고 있었고 청주(菁州:강주)와 무주(武州)는 섬진강 무역로를 이용하는 일본 찻잎 무역선들로부터 그리고 거문도에서 걸러지는 일본 찻잎 무역선들로부터 차(茶)를 만들 찻잎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게다가 흥덕왕(興德王) 때 일본 찻잎(茶葉)을 다시 중계무역(中繼貿易) 해주는 대가(代價)로 당(唐) 문종(文宗)으로부터 김대렴(金大廉)이 받아온 차나무(梌) 종자(種子)를 식재(植栽)한 지리산(智異山) 일대에서는 꾸준히 일정량 이상의 찻잎들을 자체 생산해 내고 있었다. 부족하지만 대규모 실업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찻잎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었다. 일본 찻잎(茶葉)이 수입되지 않아 발생된 폐해는 왕실과 조정(朝廷)이 있는 경주지역에 집중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찻잎(茶葉)을 확보하지 못해 차(茶) 생산이 중단되고 사굴산문과 사자산문으로부터 어떠한 세금도 거두지 못함으로써 심각한 재정(財政) 문제가 발생한 신라 왕실과 경주 중앙귀족들은 자신들의 통치구조가 와해(瓦解)되는 걸 목도(目睹) 해야 했다. 장보고가 암살된 이후 통일신라 왕실과 경주(慶州) 귀족들의 통치자금은 합포(合浦: 지금의 창원)의 봉림산문(鳳林山門)을 통해 수입된 일본산 찻잎들을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에서 가공한 후 왕실과 경주귀족들이 직접 관할하는 사찰(寺刹)들을 통해 보령(保寧)으로 보내 수출함으로써 확보되어 왔는데 이제 차(茶)를 만들 찻잎이 없었다. 884년부터 들어오지 않은 일본 찻잎들이었다. 신라 왕실이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 눈독을 들인 것은 상주(尙州)를 거쳐 가는 차(茶)들에 대한 세금을 구실로 한 징발이었다. 구산선문 중 남원의 실상산문(實相山門)이 만든 차(茶)들이 남한강 무역로를 통해 수출되기 위해 보은의 달천을 이용했는데 이때 보은을 가기 위해 상주를 경유(經由)하고 있었다. 남원 함양 거창 김천 상주 보은을 거쳐 충주로 운반되는 차들이었다. 실상종(實相宗)은 법상종(法相宗)이 자은종(慈恩宗) 또는 유식종(唯識宗)이란 별칭을 쓰며 마치 다른 종파처럼 위장하는 것처럼 천태종(天台宗)이 위장한 다른 이름이었는데 이를 미처 알지 못한 것처럼 위장한 왕실이었다. 마린 로드 상방의 차(茶)를 건드린 것이었다. 상주(尙州)에서 원종 애노의 반란이 터진 건 889년이었고 견훤이 독립한 건 892년이었다. 신라 왕실에 가장 치명적인 사건은 견훤이 안정적인 조세를 납부하는 섬진강 무역로와 승평(昇平) 무역로를 가지고 독립해 버린 것이었다. 이제 경주에 세금을 납부하는 지역은 없었다. 재정(財政) 파탄(破綻)이었다.

달천을 통해 남한강으로 들어가려면 보은에서 배를 띄어야 하는데 상주를 통해 보은으로 들어간다. 

왕조를 유지하려는 경주(慶州)의 필사적인 노력은 결국 수출용 일본 찻잎들이 집산되는 다자이후(大宰府)와 대마도(對馬島)를 정규군(正規軍)으로  습격(襲擊)하는 해적질로 이어졌다. 9세기말 신라 해적(海賊)이라 불리는 이른바 신라구(新羅寇)가 등장한 맥락(脈絡)이었다. 그들이 노린 건 차(茶)를 만들 수 있는 찻잎이었다. 894년 9월 4일 45척의 배를 동원해 천여 명의 신라구(新羅寇)가 대마도를 습격했다. 그중 302명이 전투 중 죽고 11척의 배가 노획당했으며 창 천 개와 방패 300여 개도 뺏겼다. 심지어 대장군(大將軍) 기(旗)와 부장군(副將軍) 기(旗)마저도 빼앗긴 채 철수했다고 일본 역사서 부상약기(扶桑略記)는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견훤이 지휘하는 정예 남해 수군(水軍)이 이미 독립해 버린 후여서 그 천여 명의 신라군은  신라 왕실과 경주의 귀족들이 돈을 지급해 급조한 용병(傭兵)들로 이루어진 군대였고 결국 원정(遠征)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때 포로가 된 현춘(賢春)이란 신라 병사는 신라 왕(王)이 비단과 곡식을 가져오라고 출동을 명령했고 근거지에는 백여척의 배와 2500명의 병사가 있다고 말했다고 일본 역사서 부상약기는 역시 기록하고 있다. 대마도로의 항해(航海)를 위해 당나라 사람까지 장군으로 채용해 용병(傭兵)으로 쓰고 있는 군대였다. 이미 신라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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